풍도

Feng Dao
진굴리앙의 우쌍푸( shu譜,, 비길 데 없는 영웅들의 식탁)에 묘사된 풍다오.

펑다오( (島, 중국어 번체: 馮道; 중국어 간체: 冯道; Wade–Giles: 펑타오) (882년[1] ~ 954년[1][2] 5월 21일), 예명 케다오(可ao (), 정식으로 잉의 웬이(文文王) 왕자로, 중국의 발명가, 인쇄자, 정치가였다. 오나라와 십왕국 시대에는 중국의 중요한 관직으로, 후한(後漢) 4대 왕조 중 3대(, 후진, 후주)에 재상을 지냈으며 후한(後漢) 때에는 영예로운 관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저술 작품을 인쇄하기 위한 블록 프린팅 공정 개선에 기여한 공로로 학자들은 그를 독일의 발명가 겸 대장장이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에 비유했다. 전통사학에서는 여러 가지 덕행을 칭찬하면서도 한 왕조에 충실하지 않고 여러 왕조를 섬기려 한다고 비방하기도 했다(아래 우양수, 사마광 참조). 풍도는 진걸량의 우쌍푸( shu譜, 비길 데 없는 영웅들의 식탁)에 묘사되어 있다.

옌 시대의 배경과 서비스

펑다오( 88島)는 당 시종황제 때인 882년에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징청( from淸, 현대 허베이성 광저우) 출신이었다. 그의 조상들은 대체적으로 농부들과 학자들이었다. 펑다오 자신은 젊었을 때 덕이 있고 관대하며 학문이 깊고 글재주가 뛰어나다고 한다. 그는 가난한 옷이나 음식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부모를 부양하기 위해 고된 노동을 기꺼이 견디며 가난하게 살았다. 어느 틈엔가 후당(後堂)의 주요 군벌 중 명인 류쇼우광(劉 sh)의 초청을 받아 류의 수도 유현(劉縣, 현대 베이징)의 현청(縣廳)[1]에서 비서로 근무했다.

그 무렵 당나라가 함락되고 류는 처음에는 후일량의 명목상의 신하로서 자신의 연나라를 황제로 선포한 911년, 펑은 류의 군사고문을 맡고 있었다. 그해 류는 군대를 모아 군사령관 왕추지가 다스리고 후량(後陽)의 적진( ar)과 연합한 이우서킷(李wu, 현대 허베이(河北) 바오딩( headoding)에 본부를 둔)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펑은 류우에게 이우를 공격하지 말 것을 촉구하려 했고, 이때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류는 화가 났고, 류는 그를 감옥에 처넣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를 대신하여 중개를 한 후 그는 목숨을 건졌다. 이후 진(秦)[3]으로 피신하여 진(秦) 태자 리쿤수(李 li水)의 내시(內詩) 주임인 장청예(張淸禮)가 진(秦)의 수도 타이위안(太元)의 서기장을 추천하였다.

진/라이터 탕 중

당시 리쿤수는 후한량으로부터 황하 이북의 영토를 점령하기 위한 반복적인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고, 군사 문제에서는 빈번한 명령 초안이 필요했는데, 리쿤수는 이를 펑다오에게 맡겼다.[1]

919년경 또는 919년경, 궈총타오(國忠太郞) 국방위 제1보좌관과 시비가 붙은 사건이 있었는데, 궈총타오(國忠太郞) 국방위 제1보좌관이 리 총서기가 너무 많은 장교들을 식사에 초대하고 있어 그 수를 줄여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한 뒤였다. 이에 분노한 리씨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사람들 중 몇 명이 우리의 식사에 나올지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아마 육군은 새 사령관을 뽑아야 할 것이고, 우리는 타이위안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는 펑에게 그런 취지의 선언문 초안을 작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펑은 펜을 가져갔으나 글쓰기를 망설이다가 리에게 대답하였다. "전하께서는 지금 황하 이남과 그 다음에 하늘 아래 땅을 정복할 계획을 하고 계신다. 궈총타오 주석의 요구는 지나치게 부적절하지 않다. 비록 전하께서 동의하지 않으시더라도, 왜 이 분쟁을 근방과 원방의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십니까? 우리의 적들이 이것을 배우고 전하와 신하들이 불협화음을 믿도록 하는 겁니까? 이것은 당신의 명성에 좋을 수 없다." 곧이어 구오가 사과하러 왔고, 그 일은 일단락되었다.[4] 다른 사람들은 왕자에게 충고하는 펑의 침착함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1] 또한 펑은 이러한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침대가 없는 짚으로 만든 오두막에서 생활하며, 직원들과 급여를 분담하면서 검소하게 살았다고 한다. 종종, 경찰관들은 그 지역을 약탈하고 아름다운 여성들을 데려갔다; 때때로 그들은 그 여성들을 펑에게 선물로 주곤 했다. 펑은 여자들을 데려가지 않고 대신 가족을 찾아 가족에게 돌려보내려고 했다.[5]

923년, 리는 자신을 새로운 후당(주앙종 황제로 칭함)의 황제라고 선언했다. 그는 황실의 학자 루지(Lu Zhi)와 함께 펑을 만들었다. 그 해 말 장종황제가 후량을 정복하고 자신의 소유로 영토를 빼앗은 후,[6] 펑중슈셰렌(中中中人人, 정부 입법국(中國政局, 중슈성)의 중급 관리로, 인구조사부 부부장(府事府事, Hubu Shilang)을 만들었다. 그 직후 펑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는 관직을 떠나 징청( at淸)에서 애도 기간을 지켜보았다. 당시 펑은 이미 유명해졌고 거란은 그를 잡기 위해 징청( ra淸)[1]을 급습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후당 국경군이 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실제로 거란의 급습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징청에 있는 동안 그 지방에 기근이 들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재산을 분배했다. 또한 밭을 갈지 못하거나 방심하는 자가 있으면, 그들을 위하여 밭을 갈았다.[5]

아마 926년, 그 후의 사건을 토대로 하여 펑의 부친에 대한 애도 기간이 끝난 후, 좡종 황제는 다시 황실 학자로 활동하기 위해 펑을 황실 정부(당시 뤄양)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펑이 중요한 도시 비안 현(汴州, 현대 허난 카이펑 시)에 이르렀을 무렵 후당국은 장종황제에 대항하여 일어난 많은 반란으로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주요 반란 중 하나는 장종황제의 양형인 리시위안이 주도했다. 불확실성 때문에 비앙의 수비수 공쉰은 상황이 분명해질 때까지 펑에게 비앙 현에 남아 있으라고 종용했지만, 펑은 가능한 한 빨리 보고하라는 제국주의 명령을 받고 있다고 지적해 뤄양 현으로 진격했다.[5] 그 후 곧 뤄양 스스로에 반란을 일으켜 주앙종 황제가 살해되었고, 리시위안은 뤄양에 도착하여 (명종으로서) 왕위를 주장하였다.[7]

명종황제는 오랫동안 펑의 능력과 덕목을 존중해 왔다.[1] 명종황제는 스스로 문맹자였고, 문맹자였던 안충희 수석 고문은 문맹자였기 때문에, 안 교수는 최고 학자들이 역사 및 문학 문제에 대해 황제에게 조언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 것을 권고했다. 이후 명종황제는 두안밍홀( (安明館)에 황실학자들을 위한 두 개의 직책을 세우고, 펑과 자오펑을 그 직책에 임명하였다. 927년 명종황제는 중수실랑(中水實shi, 법제국 부국장)의 호칭과 함께 통중슈 멘샤 핑장시(通中shu市)가 지정되면서 펑( c)와 추이 시( chance) 찬스텔러를 모두 더 만들었다. (펑의 임무는 고참인 런환리기를 추천했기 때문에 명종황제가 다소 타협한 선택이었고, 당시 명종황제의 참모장(슈미시) 중 한 명이었던 공은 (안씨와 함께) 쿠이를 추진했다.)[7] 재상으로 재직하면서 펑황제는 종종 농민들이 겪는 어려움을 명종황제에게 지적했고, 명종황제는 그런 어려움에 대해 펑황제가 쓴 시를 모아 수행원들에게 시문을 자주 읽어보게 했다.[8] 명종황제는 그를 시핑 공작으로 만들었다.[1]

In 930, as An had long borne grudges against Emperor Mingzong's adoptive son Li Congke, who was then the military governor (Jiedushi) of Huguo Circuit (護國, headquartered in modern Yuncheng, Shanxi), An encouraged Li Congke's subordinate Yang Yanwen (楊彥溫) to mutiny and seize Huguo's capital Hezhong (河中), forcing Li Congke to return to Luoyang. 그러자 안중근은 펑과 자오에게 리콩케를 처벌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게 하였으나, 명종황제는 이들의 청원과 더불어 이후 안중근 의사의 그러한 징벌 요청도 거절하였다. 이후 그해 말, 시촨 서킷(西川西 circuit, 쓰촨청두 본점)의 군수 멍지샹과 동촨 서킷(東京, 쓰촨미안양 본점)의 군수 동장(東長)의 반란 대처에 대해 명종황제와 안씨가 보다 공개적인 논쟁을 벌이자 안씨는 사직서를 제출했다.많은 관리들이 그에게 철수를 촉구했다. 펑황은 당시 안중근의 최선의 처신이 사직을 하는 것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다른 신하들에게 안중근 의사의 사직을 막지 말라고 촉구했지만, 자오는 동의하지 않았고, 안중근 의사의 유임을 설득할 수 있었다. (펑은 931년, 명종황제와 안중근의 균열이 커진 후, 명종황제는 931년처럼 안중근황제가 사직을 하게 되었다.)d 그리고 나서 죽였다.)[9]

933년 명종황제는 중병에 걸렸다. 일반적으로 그의 추정 후계자로 여겨지는 큰아들 리콘그롱은 황실 관리들이 그의 승계에 반대할까봐 두려웠고, 따라서 명종황제가 죽기 전부터 무력으로 권력을 잡으려고 노력하기로 결정했다. 리콘그롱의 폭동은 실패로 끝났고, 그는 살해되었다. 핵심 간부들 중 일부는 리콘그롱의 참모진들을 대량 처형할 것을 촉구했지만, 펑다오, 펑윤 등은 관용을 촉구했고, 그래서 대부분은 추방당했을 뿐이다. 명종황제는 그 직후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리농구(민황제)가 뒤를 이었다.[10] 펑다오는 계속해서 민 황제를 재상으로 모셨다.[1]

In 934, Emperor Min's then-chief advisors, Feng Yun and Zhu Hongzhao, did not want Li Congke, who was then the military governor of Fengxiang Circuit (鳳翔, headquartered in modern Baoji, Shaanxi), and Emperor Min's brother-in-law Shi Jingtang the military governor of Hedong Circuit (河東, headquartered in modern Taiyuan) to be entrenched in their posts, 따라서 연이은 이적 명령을 내리게 되어, 리콩케를 헤동과 시로 이양하여 청데 서킷(,成, 현대 허베이 시자좡에 본사를 두고 있음)으로 이양하였다. 리콩케는 이것을 함정으로 여기고, 따라서 민제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를 공격하기 위해 파견된 황군이 반항하여 그의 반란에 가담하자, 그는 뤄양에게 접근하였다. 민황제는 도망쳤다. 리콩케가 뤄양에 입성할 태세를 갖추자, 펑다오( feng島)는 당시와 후세에 모두 비난을 받았던 행동으로 공식 루다오( ()에게 관리들의 서명 청원 초안을 요청하여, 리콩케는 초고를 거부하고 펑을 꾸짖었다. 그래도 뒤이어 명종황후의 부인 조황후 이름으로 칙령이 내려져 민황제를 침공하고 리콩케를 황제로 삼았다.(민황제는 이후 유배지에서 살해되었다.)[11] 리콩케는 펑다오에게 명종황제의 묘소장을 맡겼다.[1] 그는 일단 무덤이 완성되자 펑을 수도 밖으로 내보내 콴궈 서킷(匡匡, 산시 현대 웨이난에 본사를 둔 콴궈 서킷)의 군수로 재직하면서 여전히 통중슈 멘샤 핑장시 칭호를 명예 직함으로 달고 있었다.[11] 콴궈의 수도인 통 현(通縣)에 있는 동안 펑의 통치는 관대하다고 한다.[1] 935년 리콩케는 그를 궈궈에서 떠올려 삼총사 중 한 명으로 매우 영광스러운 직책인 시콩(空空)으로 섬겼지만 실질적인 권위가 결여된 직책이었다. 실로 실체적 직책 없이 단지 삼총사 중 한 사람으로서만 봉사하는 사람이 오래 전부터 없었으므로(펑 자신은 일찍이 재상 때 시공을 겸직하여 부제(府制)로서도 시공을 지낸 적이 있었으므로, 제국 정부에서는 시공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총장 루 Wenji은 Sikong 펑은 그가 — 상태지만 곧 Lu는 실제로 청소를 수행하기 위해 대단한 명예로 펑 하는 게 부적절한 일을 알아내고, 다시 그 말 하지 않았어 영광이라고라고 말했다. 의식상의 의무 — 제국 주의 희생을 무릅쓰고 제단 청소하는 일을 담당 하기로 하다고 생각했다.[11]

후진중

In 936, Shi Jingtang, who feared that Li Congke was actually planning to kill him when Li Congke ordered him transferred to Tianping Circuit (天平, headquartered in modern Tai'an, Shandong), rebelled against Li Congke, and with aid from Khitan's Emperor Taizong, soon declared himself emperor of a new state of Later Jin (as its Emperor Gaozu), defeated 나중에 리콩케가 그에게 보낸 당군은 뤄양에게 접근했다. 리콩케는 부인 류황후, 자녀들, 조조황후와 함께 자살했다. 후일진 신황제는 뤄양에 입성했다. 그 해 말, 그는 펑다오에게 비굴한 시콩 칭호 외에 통중주 멘샤 핑장시멘샤 실랑(門 zhong侍, men deputy deputy, (xia侍)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여 다시 재상이 되었다.[12]

938년, 가오즈 천황은 자신을 '아들 황제'라고 칭하면서 거란 황제를 '아버지 황제'로 추대했고, 타이종 황제의 어머니 슐뤼왕후에게도 추서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는 더욱 존경의 표시로 펑과 또 다른 고위 관리인 류쉬를 거란으로 보내 황제와 황후 지참자에게 선물과 함께 그러한 영예를 바쳤다.[13] (이 임무는 가오즈 황제의 보호에도 불구하고 펑황에게 감명을 받은 타이종 황제가 그를 억류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펑은 거란의 가오즈 천황의 도움을 받아, 황제 대신 위험을 감수할 용의가 있다고 지적했다. 타이종 황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결국 펑이 후진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1]

939년 가오즈 황제는 슈미시가 지나치게 세력을 키웠다고 믿고 슈미시 관직을 폐지하고, 찬조자들, 특히 펑에게 그 힘을 주었다.[1][14]시트( ( (, 역시 삼총사 중 한 명)와 시즈홍(侍中, 시험국장)의 칭호를 받고, 루 공작( lu公)을 창제하였다.[1] 어느 순간 펑은 병을 이유로 사의를 표명했고, 가오즈 황제는 조카 시종귀(時宗귀)를 정나라 태자로 보냈다고 한다. 즉, 어린 시종루이를 제외한 가오즈 황제의 아들들이 모두 후당(後唐)에 대한 반란으로 살해당했거나, 또는 k를 당했기 때문이다.그에 대한 반란에 병들었던 — 펭의 사임을 만류하고, 더 나아가 시총루이를 통해, "만약 당신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개인적으로 당신을 방문하겠다"는 코멘트를 전달했다. 이 일이 있은 뒤에야 펑은 벼슬에 돌아와 계속 재상을 지냈고, 행정에서는 이보다 더 존경을 받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1][14] 이 무렵 펑과 또 다른 재상 리송이 당시 황실 호위 부사령관이던 가오즈 황제의 처남 두총웨이를 총사령관으로 추천하여 류지위안 장군을 경질하여 류의 원성을 샀다고 한다.[14]

시총루이가 어렸기 때문에 가오즈 황제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942년, 가오즈 황제가 병이 들자 펑을 불러 시총루이가 펑에게 절을 하도록 하고, 펑의 무릎에 시총루이를 앉히도록 시총루이를 앉히면서, 펑이 그의 뒤를 잇기 위해 시총루이를 지지하기를 원했음을 강력히 시사했다. 그러나 곧 가오즈 황제가 죽은 후 펑황은 황실 호위총독인 정양강과 이 문제를 의논했다. 펑과 징은 둘 다 후진이라는 위험한 상태를 감안할 때 나이든 황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들은 당시 제나라 태자 칭호를 달고 있던 시종귀가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15] 시총귀는 펑에게 타이웨이(太衛, 역시 삼총사의 한 사람)라는 명예 칭호를 부여하고 그를 연공(延公)으로 만들었다.[1]

시총귀는 가오즈 황제가 거란과 함께 취한 겸손한 자세와는 달리 거란에게 더욱 적대적인 자세를 취했다. 특히 가오즈 천황이 타이종 황제를 쓸 때 자신을 '아들'과 '당신의 신하'라고 지칭한 반면, 시종귀는 오직 자신을 '당신의 신하'가 아닌 '손자'로만 지칭해야 한다는, 즉, 개인적인 관계는 그대로 두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후진의 존재는 부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거란의 신하 리송은 이러한 입장에 반대하여 논쟁을 벌이려 하였으나, 펑이 반대하거나 지지하지 않는 가운데, 태종에게 보낸 시총귀의 서한은 가오즈 황제가 죽었고, 가오즈 황제의 뒤를 이었다는 사실을 알린 것은 오직 자신을 손자로만 지칭하였다. 이 못마땅한 태종황제는 거란의 승인 없이 왕위에 오른 시종기를 책망하며 대꾸했다. 당시 다이종 황제는 적대적인 군사행동은 하지 않았으나 944년이 되자 장군 자오옌쇼우가 캠페인을 독려하고 타이종 황제가 자오에게 성공하면 중앙 평원의 황제가 되겠다고 약속하면서 후진 지역으로의 거란의 침입이 반복되기 시작했다.[15][16] 펑은 우유부단한 재상이 결정을 내리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시총귀는 그를 다시 관궈로 보내어 군수를 지내면서 시즈홍 칭호를 명예 재상 칭호로 달고 있었다.[16] 그곳에서 약 1년 후, 중수링(中水林, 법제국장)이라는 칭호를 명예총재로 달고 웨이성 서킷(웨이성 서킷, 헤난 현대 난양에 본사를 두고 있다.[1]

랴오 침입 중

In 946, after defeating and then persuading Du Wei (i.e., Du Chongwei, who had removed the "Chong" character from his name to observe naming taboo), whom Shi Chonggui had commissioned as the commander of a major anti-Khitan army, to surrender, Khitan's Emperor Taizong advanced all the way south to the Later Jin capital Kaifeng, forcing Shi Chonggui 항복하다[17] 947년 타이종 황제는 중국 황제의 옷을 입고 요의 황제(즉, 거란의 이름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음)를 자처하면서 중국 황제가 되려는 의지도 효과적으로 드러냈고 후진 군수를 카이펑으로 불러 만났다. 당시 위성에 있던 펑다오도 그렇게 했다. 자오옌쇼우와 장리(張理) 모두 리송을 추천했으므로 타이종 황제는 펑과 리 모두를 존경으로 대했다. 그는 리수미시를 만들면서 펑다오에게 타이푸(太傅) 연기의 수도를 주었고, 그를 데리고 있었는데, 공식적으로는 슈미시가 아니었지만, 그 사무실을 나와 중요한 일을 상의한다.[18] 태종황제가 천하에 있는 모든 백성을 어떻게 구하느냐고 묻는 대화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펑씨는 "이때 부처가 다시 세상에 들어와도 백성을 구할 수 없고 황제만이 구원할 수 있다"고 응수했다. 이러한 말들이 자오의 중개와 함께 태종황제가 한족의 대량 사형을 단행하지 않은 이유라고 여겨졌다.[1] When the Later Jin general Liu Jixun (劉繼勳), whom Emperor Taizong blamed for participating in Shi Chonggui's planning for the anti-Khitan campaign, Liu tried to blame Feng and Jing Yangguang for being behind the campaign; Emperor Taizong rebuked Liu for blaming Feng, and had him delivered to the northern Khitan city of Huanglong (黃龍, in modern Changchun, 지린).[18]

그러나 947년 봄까지 타이종 황제는 인구에 대한 가혹한 습격으로 수많은 한족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후진 부와 그 핵심 관리들을 북쪽으로 다시 리아오 본부로 데려가는 동안 처남인 샤오한에게 카이펑의 책임을 맡기기로 결심했다. 도중에 죽었고, 요오 장군들은 조카 옐뤼안을 후계자(시종황제)로 받들었다.[18] 시종 황제는 이후 자오(자신이 왕위를 차지하고자 했던 자오)를 체포한 후 스스로 황제를 선언했다. 한편 이 권력 공백기에 류지위안은 후한(가오즈 천황)의 황제를 선포하고 남쪽으로 진격하여 샤오가 퇴위한 후 재빨리 카이펑으로 들어가 후진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18][19]

한편 슐루 황후는 시종황제의 등정에 반대하여 반대군을 보냈다. 그는 그녀의 군대를 물리쳤고, 그 후 그녀를 가택 연금시켰다. 그러나 선거 운동 기간 중 그는 다른 후일진 찬스텔러 리송, 허닝과 함께 펑이 남아 있던 헝 현( modern modern, 현대 시자좡)의 관리직을 옐뤼 마다 장군에 맡겼다. 옐뤼 마다는 부패하고 가혹했으며, 또한 한족 병사들을 엄한 제약을 받게 하여 그들의 불만을 끌어냈다. 이후 시종황제가 태종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후진(後進) 관리들에게 계속 북진하라는 명령을 보내자, 한병들은 장교 바이자롱(白子龍)의 지휘 아래 반란을 일으켰다. 헝 현내 전투 중에는 리구의 권유로 펑, 리송, 허닝이 직접 군사를 독려하러 갔고, 이에 따라 한병들의 사기가 높아져 옐뤼 마다를 격파하고 남은 거란군과 함께 도망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군인들은 펑에게 이 지역의 군관(청드 서킷)을 제의했으나 펑은 군관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지적에 거절하여 배이는 군관직무대행의 직함을 주장하였고, 이후 후한에게 제출하였다.[19]

후한중

펑다오, 리송, 그리고 허닝은 그 후 당시 라이터 한의 수도 카이펑으로 갔다. 가오즈 황제는 즉시 리송과 허닝에게 명예직(실체직은 아님)을 맡겼으나, 948년 봄까지 펑을 임명하지 않았다(가 더욱 명예로운 타이시(太時) 칭호를 주었으나 실질적인 직위는 없었다.[19]

At the time of Emperor Gaozu's death in spring 948 (shortly after Feng was commissioned Taishi), Emperor Gaozu had left directions to the officials and generals he entrusted his son Liu Chengyou (Emperor Yin) to (Su Fengji, Yang Bin, Shi Hongzhao, and Guo Wei) to watch Du Chongwei (who had restored his original name after Later Jin's fall) closely, 그리고 가오즈 황제가 죽은 직후, 가오즈 황제의 명령으로 그 명령을 알린 네 사람은 두를 사형에 처하게 하였다.[19] 이 때문에 후한(後漢)의 주제가 된 리수전(李壽殿)에게도 큰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이에 따라 948년 봄, 리옹은 후구오 군수로 부임하여 진창 서킷(晉,, 현대 시안, 산시성에 본사를 둔 반군 장교) 왕징총(王慶忠)과 함께 진왕자 칭호를 주장하였다. 주요 관리들은 궈 부장이 리에 대항하여 황실 호위 부대를 지휘하게 하기로 결정했다. 궈가 출발하기 전에 펑을 찾아가 펑의 의견을 물었다. 펑은 리오가 오랫동안 궈가 지휘할 황실 근위대를 이끌었으므로 황실 재정에 미치는 영향과 상관없이 크게 보상함으로써 리에 대한 그들의 친화력을 파괴할 필요가 있다고 그에게 말했다. 궈도 이에 동의했고, 이 조치로 궈가 황실 호위병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게 되어 리는 그들을 휘어잡을 능력이 없었다고 한다. 그 후 구오는 949년에 리오를 무찌를 수 있었고, 리도 자살했다. 왕도 자살했다. 자오도 처음에는 후한군에 투항한 후, 재고하다가 후한군에 의해 살해되어 세 차례의 반란이 종결되었다.[20]

950년 펑은 후대에 의해 자신과 그의 가족들에게 수여된 영예를 포함하여 가족사와 그의 경력에 대해 논한 '장레로부터 노인의 자기 묘사'라는 자전적 노트를 썼다.[1] (이 글은 후기 송나라 사학자인 오우양수(오나라신사 편집장)와 사마광(지즈 통젠의 편집장)으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는데, 이들은 모두 펑을 불성실하고 그 결과 관리들 사이에서 가장 사악한 인물이라고 묘사했다.)[5][21]

950년 겨울, 인황제는 왕장 재상과 함께 양, 시, 구오가 권력을 쥐고 혼자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한 것에 분노하여 양, 시, 왕을 살해하였다. 당시 수도 카이펑에 있지 않고 북쪽으로 군대를 지휘하고 있던 궈씨는 운명을 피했지만, 인황제는 여전히 그의 가족이 있었고 궈의 군대 모니터 왕준이 살해했다. 그 후 구오는 반란을 일으켜 인황제가 직접 대면하라고 명한 황군을 물리치고 카이펑 쪽으로 군대를 빼앗았다. 인황제는 도망쳐 도망가다가 전사했다. 이어서 궈가 수도에 들어가자 펑은 그에게 절을 하지 않고, "이번 시즈홍이 맡은 여행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22]고 담담하게 말하면서 그의 활을 받아들였다. 이와 나중에 황제 고조의 아내 황후 Dowager 리는 황제 고조의 조카 류 윤 황제 고조 아들로 입양되고 우닝 서킷(武寧, 현대 쉬저우, 장쑤성에 본사를 두고)이었던 군대 주지사, 자손에게 잘. 인사 것을 정부 관리들을 이끌Guo의 계획은 왕좌 himself,[5]을 다시 세웠다e 황제가 되다 그 후 그녀는 펑을 관리 왕두(王頭), 자오상자오( zhao子)와 함께 우닝의 수도 쉬 현( prefecture縣)으로 보내 류윤을 다시 수도로 호송하여 왕위에 올랐다.[22]

그러나 구오 휘하의 장교들은 수도를 축출한 죄로 처벌받을 것을 우려하여 류씨 가문의 또 다른 일원을 황제로서 지원하는 것에 크게 반대하였다. 이후 찬 현(澶州, 현대 푸양, 허난)에서 반란을 일으켜 궈를 황제로 받들었다. 구오는 받아들였고, 다시 카이펑으로 향하여, 그녀를 어머니처럼 기리겠다고 약속함으로써 황후 리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고, 장교 궈충웨이를 보내 류윤의 기차를 가로채게 했다. 궈충웨이가 도착하자 류윤의 호위군을 인계받아 궈웨이의 명령을 전달하고, 펑을 다시 수도로 소환하여 류윤을 자오, 왕과 함께 남겨두고, 사실상 류윤을 가택 연금에 처하게 했다.(류윤은 후에 살해되었다.)[22] 951년 봄, 궈웨이는 새로운 후주의 타이즈 천황으로 즉위하였다.[23]

후주 중

후주 신황제가 즉위한 직후 펑다오중슈 링( made zhong thus ling)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그를 운명으로 회복시켰다.[23]

그 해 말, 후한(後漢) 천황의 이복형인 무룽 옌차오(武龍 y) 장군은 후한(後漢) 주(周)에게 처음 출품한 후한(後漢) 천황의 이복동생으로, 타이닝 서킷( (泰, 산둥(山東) 현대에 본부를 두고 반란을 일으켰다. 952년 초 무롱이 패하고 자살한 후, 타이즈 천황은 무롱의 병사들을 학살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황실 학자인 두이(儀儀)는 펑( and)과 동료 재상 판지( fan志)를 만나 타이징 병사들은 무롱(武龍)에 의해 단지 전투에 내몰렸을 뿐이라고 타이즈 천황(두우 자신과 함께)에게 주장하도록 설득했다. 그들은 타이즈 황제를 설득할 수 있었고, 이후 타이닝 군인들을 사면했다.[23]

그해 말 또 다른 황실학자 쉬타이푸( ( ta)는 948년 리쇼우전의 반란에 가담할 음모를 꾸몄고, 그 거짓 고소가 리송과 그의 가족을 학살하게 한 게야뉴( (yu)와 리청(李淸)을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했었다.[20] 펑씨는 왕조에서 기회가 있었고 그 사이에 많은 일반 사면이 있었으므로 혐의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동료 재상 왕준은 리송의 원수를 갚으려는 쉬의 열정에 감명을 받아 게와 리청의 죽음을 권했다. 그 후 타이즈 천황은 게와 리청에게 사형을 내렸다.[21]

953년, 왕조가 자신의 행동에 너무 강력하고 무례하게 자라고 있다고 믿으면서(태조 황제의 양아들 궈룽이 자신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수도 카이펑에 와서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막으려 하는 등), 타이즈 황제는 펑과 다른 찬탈자들과 상의한 후 왕이를 강요했다.nto 의병퇴직. (왕후퇴와 그 후의 죽음 이후, 궈룽은 수도에 머물 수 있었고, 그 후에는 권력중심지에 남을 수 있었다.)[21]

타이즈 천황은 954년에 사망하였고, 궈룽(시종 천황)이 뒤를 이었다.[21] 시종 황제가 즉위한 직후, 타이즈 황제가 매장되기 전부터 타이위안(太元)에서 후한(後漢) 왕위를 스스로 황제라고 선언하고 합법적으로 계승한 리윤의 친아버지 류민(네 류총)이 후한(後漢)의 연속임을 주장하면서 후한(後漢)을 천명한 직후였다.역사적으로 북한(北漢)[23]으로 알려지게 된 a)은 중앙 평야에 대한 한(漢)의 지배권을 재확립하기 위해 리오의 지원을 받아 후주(後周)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시종황제는 개인적으로 류민에게 대항하는 군대를 이끌고 대응하기로 했다. 펑 황제를 비롯한 많은 관리들은 새 황제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게 하는 것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으며(시종 황제의 부재가 다른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주장), 이로 인해 역사학자들이 시종황제와 펑황제 사이의 열띤 교류가 이루어졌다.[21]

시종황제: 당 태종 황제가 하늘 아래 영토를 정복할 때 그는 항상 개인적으로 싸웠다. 어떻게 하면 이 힘든 일을 피할 수 있을까?
=황제 폐하께서 태종황제에 비견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시종황제: 우리 병력이 워낙 강해서, 류충을 물리치는 것은 마치 산이 달걀을 부수는 것과 같을 것이다!
=황제 폐하를 산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교환의 어조는 시종황제를 불쾌하게 했지만, 재상 왕푸는 개인적으로 군대를 이끌겠다는 시종황제의 생각에 동의했고, 그래서 시종황제는 어쨌든 그렇게 했다. 시종황제가 떠날 채비를 갖추자, 그는 펑황제에게 타이즈 황제의 관을 황실 묘에 동행시키고 그 장례를 감독하도록 위임했다. 시종황제는 결국 선거 운동 중 북한군을 격파하고, 펑황제는 시종황제의 승전 복귀를 앞두고 전사했다.[21]

인쇄술 발전에 기여

932년 풍다오는 가동목판으로 인쇄한 유교 고전을 주문하였다. 블록인쇄가 발명된 지 약 1세기가 지나자 펑다오는 인쇄 과정을 대폭 개선하여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였다.[24] (프로젝트는 953년에 완성되었는데, 완성된 인쇄본이 후주의 타이즈 천황에게 출품되었다.)[21]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서양에 있는 것처럼 그는 일반적으로 중국에서 현대 인쇄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시안에서는 932년부터 953년 사이 130권으로 해설을 곁들인 유교 고전의 제1표준판이 발간되었다. 향상된 인쇄 기술은 빠르게 보급되었고, 가장 일찍 알려진 한국 책은 950년에 인쇄되었다.

"중국에서 인쇄를 위해 펑타오나 그의 동료들의 작품은 유럽의 구텐베르크의 작품과 비교될지도 모른다. 구텐베르크 이전에는 확실히 블록 인쇄가 있었고 타이포그래피에서도 매우 가능성이 높은 실험이 있었지만 구텐베르크의 성경은 유럽 문명에 새로운 날을 예고했다. 같은 방법으로 펑타오 이전에도 인쇄가 있었지만, 그것은 나라의 문화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무명의 예술이었다. 펑타오의 고전은 성시대의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힘을 실어주는 인쇄를 만들었다.(펑이 사용한 텍스트의 버전은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에서 정탄(鄭 tan)이 돌에 새기라고 명령한 텍스트에서 나온 것이다.)[25][1]

메모들

  1. ^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오대조역사, 126권.
  2. ^ 중국-서부 캘린더 컨버터, 학계 시니카
  3. ^ 지즈 통지안, 268권.
  4. ^ 지즈 통지안, 제270권.
  5. ^ a b c d e 5대 왕조새로운 역사, 제54권.
  6. ^ 지즈 통지안, 제272권.
  7. ^ a b 지즈 통지안, 제275권.
  8. ^ 지즈 통지안, 제276권.
  9. ^ 지즈 통지안, 제277권.
  10. ^ 지즈 통지안, 제278권.
  11. ^ a b c 지즈 통지안, 제279권.
  12. ^ 지즈 통지안, 제280권.
  13. ^ 지즈 통지안, 제281권.
  14. ^ a b c 지즈 통지안, 제282권.
  15. ^ a b 지즈 통지안, 제283권.
  16. ^ a b 지즈 통지안, 제284권.
  17. ^ 지즈 통지안, 제285권.
  18. ^ a b c d 지즈 통지안, 제286권.
  19. ^ a b c d 지즈 통지안, 제287권.
  20. ^ a b 지즈 통지안, 제288권.
  21. ^ a b c d e f g 지즈 통젠, 291권.
  22. ^ a b c 지즈 통지안, 제289권.
  23. ^ a b c d 지즈 통젠, 제290권.
  24. ^ 카터, 토마스 프랜시스 (1925년) 중국의 인쇄술의 발명과 확산된 뉴욕 웨스트워드 컬럼비아 대학 출판부, 페이지 26 OCLC 017475779
  25. ^ 카터, 토마스 프랜시스 (1925년) 중국의 인쇄술의 발명과 확산된 뉴욕 웨스트워드 컬럼비아 대학 출판부, 페이지 53 OCLC 01747577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