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태종

Emperor Taizong of Liao
요 태종
遼太宗
요나라제2대 황제
군림하다927년 12월 11일 – 947년 5월 18일
전임자타이즈 천황
후계자시종황제
태어난야오구 (키탄 이름)
옐뤼 데광(시닉네임)
902년 11월 25일
죽은947년 5월 18일(947-05-18) (44)
배우자샤오원
이슈요 무종
황태자(황태자) 친징(진징)
시대 날짜
톈시안 (天皇; 927–938)
후이퉁(後東; 938–947)
Datong (大同; 947)
섭정명
시성 천황(嗣城天皇)
사후명
샤오우후이원 천황(孝武文天皇)
사원명
타이종 (太宗)
아버지타이즈 천황
어머니슐루핑 황후
요 태종
중국어 번체遼太宗
중국어 간체辽太宗
야오구 (키탄 이름)
중국어 번체堯骨
중국어 간체尧骨
옐뤼 데광(시닉네임)
중국어耶律德光
데진 (코르테시 이름)
중국어 번체德謹
중국어 간체德谨

요 천황 타이종(902년 11월 25일 – 947년 5월 18일), 개인명 야오구, 시니컬명 옐뤼 데광, 예명 데진( de津)은 중국 거란( khitan) 요나라의 제2대 황제였다.

배경

옐뤼 데광은 요 왕조가 건국되기 전인 902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옐뤼 가문의 족장 옐뤼 아바오지였고, 어머니는 옐뤼 아바오지의 아내 슐뤼 핑이었다. 그는 그들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랴오 역사에서 그의 외모는 진지하고 기질은 친절하며, 종종 부모의 국가 통치에 참여한다고 묘사되었다.[1]

922년, 옐뤼 아바오지가 요나라의 황제였을 무렵, 옐뤼 데광은 전군 제너럴리시모(天君 general兵馬大大, 톈샤 빙마유안슈아이)라는 칭호를 받고, 거란의 남부 이웃 진()의 영토로의 침입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923년, 그의 휘하에서 요군은 진의 핑 현( ( (, 현대 허베이성 친황다오)을 점령하고, 시주의 후순족(後胡族)도 격파하였다. 이후 타이즈 천황의 뒤를 따라 거란 쥘리 부족(厥里),)을 무찌르고, 오르도스 루프 지역의 당샹 부족을 강제로 굴복시키고, 허시 회랑 지역의 방위를 정복하고, 간쑤 위구르 왕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발해를 물리치고, 달구 부족을 멸망시켰다고 한다.[1]

926년, 타이즈 황제는 발해를 정복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캠페인에서 발해의 중요한 도시 푸유(yu餘, 현대 지린 시핑에서)를 사로잡았다.[2] (이때 타이즈 황제가 발해의 수도 룽취안을 함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으로 발해국은 종식된 것으로 보인다.)[3] Emperor Taizu set up a Dongdan Kingdom over the old Balhae territory, with its capital at Fuyu, and made Yelü Deguang's older brother Yelü Bei its king, with the title of "Imperial King of Man" (人皇王, Ren Huangwang), echoing the titles used by himself ("Imperial Emperor of Heaven," 天皇帝, Tian Huangdi) and his wife (Yelü Bei's mother) Empress Shulü ("지구의 제국 황후") 后后,, 디황후. 그는 옐뤼 데광에게 '제너니시모 황태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옐뤼 데광에게 이전에 옐뤼 베이가 담당했던 요오 수도 린황(臨,, 내몽골 현대 치펑)을 담당하게 했다.[2]

그러나 후유를 정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타이즈 천황은 병으로 쓰러져 후유에 머물다가 죽었다. 슐뤼 황후가 요나라의 효과적인 지도권을 이어받았고, 그녀와 옐뤼 베이는 타이즈 황제의 관을 다시 린황으로 호송하는 트레킹을 시작했으며, 타이즈 황제의 동생인 안두안(安安)이 동단(東丹)에서 임시로 담당하게 되었다. 그 후 린황으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이 옐뤼 데광에게 편애했던 것처럼 후계자를 옐뤼베이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정식으로 그녀는 옐위베이, 옐위 데광과 함께 족장집회를 소집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두 아들을 모두 사랑하고, 어느 아들을 황제로 삼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의 고삐를 잡으면 어느 쪽을 지지하고 싶은지 결정할 수 있다." 치프들은 그녀가 옐뤼 데구앙을 총애하는 것을 알고 그에게 달려들어 그의 고삐를 잡았다. 그 후 그녀는 그를 황제(태종 황제)라고 선언했다. 이 같은 사태 변화에 분노한 옐뤼 베이는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후당(진나라의 후계국)으로 피신하고 싶었으나 요나라 국경수비대에게 가로채였다. 슐루왕후는 그를 벌하지 않고 동단으로 보냈다.[2][4]

재위초년

태종황제는 어머니 슐루 황후를 황후로 추대하고, 슐루 황후의 조카인 부인 샤오웬을 창시하였다.[1][2] 황후가 병이 나서 밥을 먹지 못하면 그도 먹지 않고, 어머니가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다면 성질이 가라앉을 때까지 감히 어머니를 만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2]

930년, 타이종 황제는 동생 옐뤼 리후 황태자를 만들었다.[1] 그 해 말, 다시 우회당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 옐뤼 베이는 동단에서 거란의 남쪽 이웃인 후당(진씨의 후계국)으로 도망쳤다.[5]

935년 소황후는 그녀와 타이종 황제의 차남 옐뤼 옌체게(耶ü罨 ()를 낳은 후 병에 걸려 죽었다.[1] 타이종 황제의 남은 통치 기간 동안 또 다른 황후는 없을 것이다.[6]

후진 상공 오버로드쉽

랴오 왕조 해머

후진설립중

936년 현재 후당(後唐)은 형수 리콘케(李 conke, 산시성 현대 타이위안에 본사를 둔 東京)의 군사령관(지두시) 시징탕이 자신에게 반항할 것이 의심되어 내분에 휩싸였다. 제국 학자인 리송과 뤼치(李ü)의 조언에 따라 리콩케는 시 주석이 거란에게 원조를 구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 거란과 동맹에 들어갈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또 다른 황실 학자 세원유(世元yu, 薛文遇)[7]가 타이종 황제가 혼인 동맹을 요구할 것이라고 예측하며 반대 주장을 펴자 리콩케는 생각을 바꿔 동맹 제안을 한 적이 없다.

얼마 후인 936년 여름, 리콩케는 슈에의 제안으로 시호를 허동에서 톈핑회로(天平路, 산둥타이안에 본사를 둔 天平路)로 옮기는 칙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시호는 헤동을 떠나면 처형될 것을 두려워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With Li Congke then sending an army, commanded by Zhang Jingda, to attack Hedong, Shi sent emissaries to Khitan to request aid, promising that, if Emperor Taizong would support him as the emperor of China, to serve Emperor Taizong as a father and to cede Lulong Circuit (盧龍, headquartered in modern Beijing) and Hedong's prefectures north of the Ya엔멘은 거란에게 통한다. 시황제는 시황제가 거란궁에 도착하자 기뻐하며 슐뤼 황후에게 "당신의 아들은 시황제가 이곳에 전령을 보낼 것을 꿈꿨다. 이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이것이 하늘의 뜻이었소." 그는 가을에 자신의 제국 전군을 이끌고 시군을 돕겠다고 회답을 보냈다.[7]

한편, 장은 허동의 수도 타이위안을 포위했다. 타이위안은 식량 공급이 부족했지만, 방어가 막혔다. 늦가을 타이종 황제는 스스로 5만 기병(그러나 공개적으로 30만 기병이라고 주장)을 지휘하고 타이위안(太元)으로 향했다. 타이위안(太元)의 변두리에 도착하자 시 주석은 즉각 교전하지 말고 주의를 촉구했지만 타이종 황제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장나라의 군대를 즉시 결전시켜 그것을 격파하고 타이위안의 포위를 해제시켰다. 장군의 잔당들은 타이위안 부근의 진안 기지(秦安地)에 자리를 잡았으나 거란·헤동 연합군은 그 후 포위했다. 태종황제는 진안에서 후당군을 계속 포위하면서 그의 국가를 진(후대 역사학자들이 후대진이라고 부른다)으로 알리면서 시황제를 만들었다. 시 주석의 즉위 발표의 일환으로, 그는 총 16개 현에 대해 루룽과 헤동 일부 지역을 거란에게 양도하기로 한 합의서와 함께 매년 많은 양의 비단을 공물로 제출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7]

Li Congke ordered Zhao Dejun the military governor of Lulong to command another army to rescue Zhang at Jin'an, but Zhao himself wanted Emperor Taizong's support to be emperor of China, and therefore halted some distance away at Tuanbo Valley (團柏谷, in modern Jinzhong, Shanxi), while he sent secret emissaries to Emperor Taizong's camp, negotiating w그 사람 말이야. 태종황제에게 금과 비단 뇌물을 제출한 자오는 거란과 친족국가로서의 조건을 약속하고 시종에게 허동을 유임할 것을 약속했다. 자오의 군대는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에 태종황제는 꾀어냈다. 이를 들은 시 부주석은 자신의 측근인 상웨이한을 보내 타이종황제에게 간청하여 거란·라터진 세력이 득세할 것이며 시 부주석에게 등을 돌리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태종황제는 심사숙고 끝에 상왕과 뜻을 같이하고 자오의 서곡을 거절했다.[7]

진안이 석 달 동안 포위되어 물자가 바닥난 후 장나라의 부관 양광위안은 장군을 암살하고 남은 후당군을 항복시켰는데, 태종은 이를 시황에게 넘겼다. 그리고 후당 수도 뤄양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양군이 항복한 가운데 자오의 군대는 사기를 잃고 또한 무너졌고 자오는 항복했다. 당시 자신이 또 다른 후당 구원군을 이끌고 북진했던 리콩케는 뤄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으나, 일단 뤄양으로 돌아온 후 사기가 무너지고 이미 많은 장군들이 연합 거란/라터진군에 항복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타이종 황제는 시 부자를 루 현(潞州, 산시창즈 시)으로 호송한 다음, 거란군이 실제로 뤄양에 도착하면 한족이 패닉에 빠질 것이라는 신념을 들어 시 부장이 뤄양에 접근하는 동안 루 부에 머물렀다.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한 리 콩케는 가족과 함께 자살했다. 자살하기 전에 그는 타이종 황제의 형 옐뤼 베이를 처형시켰다. 시 주석은 뤄양에 입성하여 그곳에서 권위를 세웠다. 그는 옐뤼 베이의 관을 명예롭게 거란에게 호위하게 했다.[7]

후진(後進)의 중국 중부권 인수 이후

타이종 황제는 그가 억류했던 많은 후당 장군들과 함께 거란 본국으로 돌아왔다.[1] 또한 루룽의 수도 유 현( (幽縣)을 남부 수도로 정하여 새롭게 수령된 16개 현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였다. 그는 붙잡힌 관원 장리를 존경하고 장의 충고를 많이 들었다.[8]

937년 후진의 동남쪽 이웃인 우씨의 섭정이었던 쉬 가오는 거란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수립하려 했다. 타이종 황제는 그 답례로 우에게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그 해 말, 타이종 황제는 국호를 거란에서 요로 바꾸었다. 그는 중국 정부를 본떠 자오더준의 아들 자오옌쇼우를 참모총장(슈미시) 겸 총리로 삼았다. 이후 쉬에가 우왕좌를 점령하고 남당을 황제로 옹립한 후, 리오와 우호 관계를 계속하였으나, 한 번은 리오 사절단이 후진 영토로 건너가자 리오 사절단을 암살하기로 결정하여, 암살의 책임을 후진에게 돌리고 리오 사절과 후진 관계를 교란시키기를 희망하였다.[8]

한편 시징탕은 후진의 황제로서 요오에게 계속 매우 순종했다. 938년 태종황제와 슐루 황후에게 존칭을 바치고, 그의 고위 관리인 펑다오( and島)와 류수(劉 xu)를 요법정에 보내 정식으로 작위를 수여하였다. 시황제가 후진의 황제로 즉위하는 동안 자신을 '주체'와 '아들'이라고 칭하면서 태종황제를 '아버지 황제'라고 칭했다. 타이종 황제가 그에게 칙령을 내릴 때마다, 그는 존경을 표하기 위해 자신의 황실 홀이 아닌 샛 홀로 그것들을 받곤 했다. 요황제와 황후의 생일이나 주요 요직의 사망에 즈음할 때마다, 그는 종종 슐뤼 황후, 옐뤼 리후, 옐뤼 안두안, 요의 남부와 북부를 관할하는 두 명의 찬조인, 자오옌쇼우, 한옌후이 등 한족 핵심 간부들에게도 선물을 하곤 했다. 게다가 태종황제가 거만한 어명을 보내도 시종은 순순히 응하곤 했다. 따라서 시나라 통치 기간 내내 랴오와 후진 사이에 분쟁이 없을 것이다.[8]

938년 말 시 주석은 당시 톈시옹 서킷의 군수였던 양광위안(楊光元, 허베이한단에 본사를 두고 있는 톈시옹 서킷(天西ion, Hubany Handan)이 통제가 어려워질 것을 우려하여 톈시옹을 분할하여 양광원을 허양 서킷의 군수로 옮기고 뤄양 서킷의 수비수로 옮겼다. 이 운동 이후 양씨는 후진 황제에 분개하기 시작하여 요궁과 비밀 교신에 들어갔다고 한다.[8]

In 939, fearing that An Chongrong the military governor of Chengde Circuit (成德, headquartered in modern Shijiazhuang, Hebei) would rebel, Shi moved An's potential ally Huangfu Yu (皇甫遇) the military governor of the neighboring Yiwu Circuit (義武, headquartered in modern Baoding, Hebei) to Zhaoyi Circuit (昭義, headquartered at Lu Prefecture). 타이종 황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우의 군주임무에 자신을 투입하려 하였는데, 그 아버지 왕추지가 후당(後唐)의 전신인 진(陳)과 연합하여 이우를 통치했던 요오 관리 왕웨이(王 wei)를 이우의 군주임무관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하였다. 시 부주석이 거절하자(왕 부주석이 (현장에서 군현, 수비수, 군수) 자격을 얻으려면 몇 겹의 진급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근거에 근거해 타이종황제는 "군주임에서 천자가 되기까지 몇 겹의 진급 과정을 거쳤느냐"는 분노한 반응을 돌려보냈다. 시 주석은 겁에 질려 풍성한 조공을 보내 왕추지의 손자인 왕팅인(王王仁)을 이우의 군수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은 타이종 황제를 다소 누그러뜨렸다.[9]

안총룽은 후진(後進)에 대한 반란을 고려했을 뿐 아니라, 특히 요오에게 적대적이었다. 요오 사신이 청드를 통과할 때마다 그는 그들을 저주하고 때로는 죽이기까지 했다. 940년, 요오 사신을 압류한 뒤, 요오에게 순종하는 것을 종식하고 요오에게 중국인을 학대한 것에 대해 등을 돌릴 것을 요구하는 교만한 내용의 탄원서를 시오에게 제출했다. 상은 시에게 요오에게 등을 돌리면 아무런 이득도 얻을 수 없다고 은밀히 지적했고, 타이종 황제에 대한 평가에서 타이종 황제를 "남들보다 더 똑똑하고 용감하다"고 언급했다. 시 주석은 상씨의 말을 듣고, 대신 랴오에 대한 도발적인 행동에 대해 안씨를 설득하려 했다. He also sent Yang Yanxun (楊彥詢) the military governor of Anguo Circuit (安國, headquartered in modern Xingtai, Hebei) as an emissary to Liao, to explain to Emperor Taizong, who was angry over An's killing of Liao emissaries, to explain that An's provocative behavior did not reflect a chance in Later Jin's overall submission.[9]

941년 겨울, 안충룽의 동맹인 산안동서(山安東西) 군수 안농진(安 con東 con, 후베이(湖北) 현대 샹양( xiang陽)에 본부를 두고 있다)이 후진(後進)에 반기를 들었다. 얼마 뒤 안콩진의 등극을 들은 안충룽도 그렇게 했다. 후진군은 시종의 처남 두충웨이가 지휘하는 안충룽에 대항하여 신속하게 안충룽을 격파하였고 안충룽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시씨는 안총룽의 머리를 요오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그러나 시종 직후에야 비로소 안총룽의 머리가 파괴될 것이다.)[10]

태종황제는 안총룽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후진에게 방목지를 양도한 토유훈 부족민들이 요오에서 후진에게 다시 귀속하는 일이 잦았다고 시 부주석을 꾸짖으며 후진에게 사신을 계속 보냈다. 이것이 시에게 많은 공포를 안겨주었고 그로 인해 병이 났다고 한다. 942년 여름에 그는 죽었다. 펑다오( and島)와 후진(後進) 황실 호위대장 정양강(鄭陽江)의 논의 끝에 국가에는 고령의 황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후진(後進)의 황제로 시(詩)의 막내이자 유일한 생존자인 시총루이(時총루이)를 후진(後進)의 황제로 지원하는 대신, 후진(後進)의 아들, 친조카인 시총귀(詩忠귀(詩忠귀(詩 chong)를 후진(後)을 지원하였다.n의 [10]황제

후진과의 갈등

초기관계악화

시총기가 후진 왕위에 오른 직후, 랴오-라터 진 관계의 어조는, 시총귀가 징옌강의 충고에 따라 리송의 권고에 따라 탄원서를 제출하지 않고 오히려 랴오 궁정에 서한을 보내, 근본적으로 주들이 평등하다고 선언하면서, 요우-라터 진 관계의 어조는 운을 띄기 시작했다. 더구나 편지에서 그는 자신을 '주체'라고 부르지 않고 오직 '손자'라고만 불렀다. 이 때문에 태종황제는 화가 나서 감히 왕위에 오르기 전에 나에게 먼저 보고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맞받아쳤다. 징은 시 부주석을 대신해 무례한 답변을 작성했다. 그 후, 당시 뤄룽의 군사령관이었던 자오옌쇼우(쟈오옌쇼우)는 타이종 황제가 시종을 자오 자신으로 대신하기를 바라면서 후진(後進)을 공격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태종황제가 꾀기 시작했다.[10]

한편 징은 후진(後進)의 수도 카이펑에 주둔하고 있는 랴오 상무관인 챠오룽(喬榮)을 체포하고 랴오의 상업 자산을 압류함으로써 적개심을 고조시켰다. 게다가 요오 상인들은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챠오가 그 해 말 석방되어 요오 복귀를 허락하자, 징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오만한 연설을 했다.[10]

주인에게 전하라: 죽은 황제[즉, 시징탕]가 북조[즉, 요오]에 의해 그의 지위에 놓였고, 그래서 그는 자신이 대상이라고 자처하고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현 황제는 중국 스스로 자신의 지위에 놓였다. 북조선에 종속된 유일한 이유는 죽은 황제가 입성한 동맹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손자라고 자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자신이 대상이라고 주장할 이유가 없다. 북쪽 왕조의 황제는 자오옌서우에게 속아 중국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 중국이 보유한 군사와 말들을 보셨을 겁니다. 할아버지가 화나시면 우리랑 싸울 수 있어. 손자는 예리한 칼 10만 자루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손자에게 패한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마라!

챠오는 태종황제가 랴오 부의 손실에 대해 자신을 책망할 것을 우려하자, 징을 치켜세우며 종이에 자신의 말을 적어 달라고 부탁했다. 징은 비서에게 그 말을 적어 챠오에게 주도록 했다. 챠오가 그들을 타이종 황제에게 바치자, 타이종 황제는 격분하여 후진을 공격할 결심을 굳혔다. 그는 후진 사신을 유현에 감금하고 직접 그들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상웨이한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시종귀가 리오에게 복종으로 돌아가자고 거듭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징은 시종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거듭 말렸다.[10]

943년 겨울까지 당시 후진의 핑루 서킷(平,, 산둥웨이팡(quarteredquartered, 본점 산둥 현 웨이팡)의 군수였던 양광위안은 후진 제국 정부와 상호 의심스러운 관계에 있었고, 아직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사이 타이종 황제와 교신하면서 시기의 반란을 부추겨 후진을 공격하라고 재촉했다.개미의 행동 이후 타이종 황제는 자오에게 뤄룽과 다퉁(大大, 산시 현대 다퉁에 본사를 둔 大東) 서킷에서 5만 명의 군사를 주어 "획득하면 황제로 삼겠다"고 하면서 중국 중부 포획 운동을 관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또 한족에게 자주 자오를 가리키며 "이분이 네 주군이다"[10]라고 진술했다.

랴오가 후진 영토로 침입함

944년 봄, 타이종 황제는 자오옌저우와 자오옌자오(趙 yanha)를 전진 지휘관으로 삼아 후진(後進) 영토로 크게 침입하였다. 랴오 군은 먼저 베이 현(, modern, 현대 허베이성 싱타이 시)을 점령한 뒤 예두( former former, 구 톈시옹 서킷의 수도) 부근에 군집했다. 시총귀는 외교적으로 대응하려 했으나 그의 사신들은 요나라 군대를 뚫고 타이종 황제에 이르러 그의 서신을 전하지 못했다. 그는 또한 다수의 장군들을 파견하여 대응하게 하였는데, 징양강이 작전 전반을 효과적으로 지휘하는 한편, 자신도 전선으로 나갔다. 그러나 헤동을 향해 옐뤼 안두가 이끄는 두 번째 랴오 추력은 헤동의 군사 주지사 류지위안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진의 보 현(博博, 산둥랴오청 현)은 양광위안(陽光元)과 밀통하던 저우루(周 ru, 현대 랴오청)가 보를 요나라군에 항복시키고, 마자커우(馬子ak, 현대 랴오청)에서 황하를 건널 것을 독려하여 양현과 힘을 합쳤다. 징은 톈핑의 군사령관 대행인 옌칸(延 kan)에게 리오군이 강을 건널 수 있다면 재앙이 뒤따를 것이라고 확신하여 후진 제국군은 리오군이 성공적으로 건널 수 없도록 마자커우에서 리오군과 전투를 벌이는 데 주력했고, 그렇게 할 수 있었다.[10] 랴오군은 이에 분노해 자신들이 포로로 잡은 한 민간인을 학살했고, 이로 인해 민중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이후 944년 봄, 두 황제가 지휘하는 군대가 예두 근처에서 대치하였으나 서로 교전하지 않았다. 결국 랴오군은 황하 북쪽에 있는 후진(後進)의 영토를 점령하면서 약탈을 감행하면서 철수했다. 양용은은 핑루의 수도 청 현(淸縣)에서 서쪽으로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요나라 군대를 만나 황하(黃河)에서 만나려 했으나 그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요나라 군대가 떠난 뒤였다. 그러자 시 주석은 황실 호위대장 리수전을 보내 양씨를 공격하게 하였고, 944년 겨울 양씨의 아들 양청순(楊淸 cheng)은 아버지를 가택 연금에 처하게 하고 항복했다.(양광위안은 후에 시씨의 명령으로 비밀리에 살해되었다.)[11]

944년 겨울, 타이종 황제는 다시 자오옌쇼우를 전진사령관으로 삼아 후진 지역으로 대대적인 침입을 감행하였다. 시 주석은 당초 후진군을 직접 지휘할 예정이었으나 당시 병으로 쓰러졌다. 그는 여러 장군들을 파견하여 요오군 운동을 단절하려 하였으나, 이후 요오군의 강점을 두려워하여 예두 지역으로 후퇴하여 요오군이 예두까지 무임승차할 수 있게 하여, 요오군이 계속 진행되면서 후진 영토를 약탈하였다. 그러나 그 후 요군은 945년 봄에 철수했다. 랴오 군이 철수하자, 시 주석은 두웨이(즉, 시에게 금기시하는 이름을 지우기 위해 이름을 바꾼 두총웨이)와 리를 군령으로 보내 추격전을 펼쳤다. 이들은 랴오 영토로 건너가 제(祁)와 태(太)를 포로로 잡았으나 곧 랴오군이 방향을 돌려 자신들을 향해 가고 있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들은 철수하려고 했으나, 현대 바오딩에서 양청(陽淸, 陽淸, 陽城, 大門) 부근에 포위되었다. 뒤는 당황하여 요나라 군대와 교전하기를 꺼렸으나, 후옌칭의 옹호에 따라 푸, 장옌제, 야오위안푸(藥 yuanfu (), 황후유(黃fu yu遇) 등이 요오 군을 맹렬히 공격하여 요나라 군대는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 태종황제가 유에 다시 집결할 수 있게 된 후, 조오옌수우만이 처벌을 면하면서, 작전의 일부였던 족장들을 수백번씩이나 통조림하였다.[11]

이쯤 되자 끊임없는 랴오족의 침입이 후진의 제국 군대를 지치게 하고 국경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고 기술되었다. 리오 그 자체도 군인과 동물들에게 많은 사상자를 냈고, 거란 사람들은 캠페인에 싫증이 났다. 태황후 슐뤼는 후진(後進)과 함께 태종황제를 더욱 유화적인 자세로 설득하려 했다. 한편 이때까지 징으로부터 군사적 책임을 상당 부분 넘겨받은 상웨이한도 시 부주석의 화해적 접근을 촉구하고 있었다. 945년 여름, 시씨는 사절 장희(張熙)를 랴오 법정으로 보내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다. Emperor Taizong responded, "Send Sang Weihan and Jing Yanguang to come see us, and cede the two circuits of Zhen (鎮州, i.e., Chengde, as Zhen was the capital of Chengde, now renamed Shunguo (順國)) and Ding (定州, i.e., Yiwu, as Ding was the capital of Yiwu) to us, then there will be peace." 시 부국장은 이 같은 대응이 모욕적이라고 판단, 추가 교신을 중단했다.[11] 고려 태조와의 랴오와의 동맹을 고려하였으나, 고려가 요오를 공격할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12]

랴오의 후진 파괴

946년 자오옌쇼우가 후진(後進)으로 망명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은 후진(後進) 참모총장인 리송(李松)과 펑유가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두웨이가 자오에게 편지를 쓰게 하여 자오옌서우 밑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장교 자오싱시(子 zhao時)와 함께 자오에게 편지를 전달하게 하였다. 자오옌쇼우는 (후진군을 함정으로 이끌기 위해) "나는 오랫동안 이국땅에 있었고,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내용의 답장을 썼다. 제발 소군을 일으켜 나를 받쳐 주옵소서, 내가 몸을 빼서 그것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이후 타이종 황제의 명을 받아 리오 현(瀛州, 현대 허베이성 칸저우시) 류옌주오(劉延uo)도 후진(後進)으로 망명하겠다고 제의했다. 따라서 시 주석은 두와 리수전을 북으로 공격하기 위한 군대를 지휘하게 되는데, 명기된 목적은 먼저 리오에게 양도된 현을 탈환한 다음 리오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조와 리가 진격할 때는 태종 황제가 친히 지휘하는 대군을 맞았다. 요군은 결국 후진군을 중두교(中都橋, 현대 바오딩)에서 포위했다. 태종황제가 투항하면 황제로 삼겠다는 약속을 두왕에게 한 뒤 두왕과 리는 군사를 내었다. 타이종 황제는 자오에게 후진군을 위로하게 하고 후진군이 이제 그의 군대라고 말한 다음 남쪽으로 진격할 준비를 했다. 사실상 후진군 전체가 이 북진운동을 위해 두와 리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당시 진의 수도 달리앙은 근본적으로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었고, 시총귀는 후진군을 끝내면서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태종황제는 이어서 달리앙에 입성했다.[12]

중국 중부에 대한 임시 통치

타이종 황제는 자오옌저우와 두충웨이와의 약속을 어기며 자신 또한 중국의 황제라고 선언했다. 그는 시종귀에게 푸이의 마르퀴스(즉 "의에 반한 결혼")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시종과 시종의 가문을 시종의 옛 왕국에서 떨어진 랴오 본래의 황량한 지역으로 옮겼다. 후진의 관리들과 군수들은 거의 모두 그를 황제로 인정하면서 그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는데, 후진의 군수 시 콴웨이(史 ku威)와 허충젠(河忠建)은 랴오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구 후진 제국군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힘을 두려워하여 그는 병사들을 학살할 것을 고려하였으나, 그렇게 하는 것은 후진의 서남쪽 이웃 후수와 남동쪽 이웃인 남당의 공격과 점령에 열려 있는 후진 영지를 단지 개방할 뿐이라는 자오의 지적에 따라, 그는 그 생각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달리앙에 온 후진 군사령관들을 붙잡아 달리앙에 경의를 표하도록 하는 한편, ( 거란족과 한족 모두의) 다수의 랴오 장군들을 시켜 서킷을 장악하게 했다. 자신의 통치가 확고하다고 믿은 그는 잔치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전 후진 관리들에게 "우리는 중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신은 우리 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진술했다. 이 대승을 축하하기 위해 슐뤼 황후는 거란 땅에서 온 포도주, 진미, 과일 등을 달리앙으로 보냈다. 그는 그녀가 보낸 와인을 마실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진술했다. "이것은 황후께서 주신 것이다. 앉아서 마실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13]

그러나 이 환희 속에서 타이종 황제는 그 후 막 정복한 땅의 백성들을 소외시키는 행위를 감행하였다. 다이종 황제와 함께 온 요나라 병사들을 공급하기 위해 세수를 거둬들여야 한다는 자오의 지적에 타이종 황제는 "우리 땅에는 그런 풍습이 없다"고 응수했다. 오히려 랴오 군인들을 시골로 내보내 약탈을 시켰는데, 이를 "풀씨를 갉아먹는다"(打草穀)고 했다. 이로 인해 한족 어른들이 많이 죽었고, 한족 청년과 노인들은 같은 운명을 피하기 위해 참호 속에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달리앙뤄양, 정()을 포함한 지역의 모든 민물과 동물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는 또 자신이 사신을 보낸 현뿐만 아니라 수도의 모든 곳에서 민중들이 요오 병사들에게 (확실히) 보상받을 수 있도록 재산을 넘기도록 강요하라고 명령했지만, 실제로는 다시 요오 본국으로 수송할 계획을 세웠다. 이로 인해 한족 사이에 원성이 생기고, 요나라 세력을 몰아내려는 정서가 커져 갔다.[13]

랴오에게 제출하면서 달리앙에 가서 경의를 표하지 않은 대표적인 후진군수 중 한 사람이 바로 타이위안(太元)에 머물 핑계를 대면서도 랴오에게 즉각 저항을 선언하지 않은 헤동군수 류지위안이었다. Emperor Taizong tried to get him to commit by sending emissaries to him to award him a cane (which was only matched by what Emperor Taizong awarded to Yelü Anduan, as the emperor's uncle) and also having the emissaries state to him, "You did not serve the southern dynasty [(i.e., Later Jin, as Liu, while outwardly a vassal of Shi Chonggui's, made 그를 구하려는 시도는 없다]], 그리고 이제 그대는 북쪽 왕조[즉, 요오]를 섬기지 않는다. 무슨 속셈이야?" 한편 반독립국가인 징난국통치자인 가오콘구이는 타이종황제에게 조공을 제출했고, 타이종황제는 답례로 말상을 보냈으나, 가오 역시 류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리오에게 저항하여 황제임을 선언하도록 격려하였다. 남당의 황제 리징도 태종에게 사신을 보내어 후진을 멸망시킨 것을 축하하고 (리징이 당황제의 합법적인 후계자라고 주장한 대로) 건설 인부들을 보내서 당황제의 무덤을 수리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타이종 황제는 거절했지만, 여전히 대응으로 남당에게 사신을 보냈다.[13]

한편, 원래의 후진(後進) 부군수들이 더 이상 서킷에 있지 않게 되자, 장교들이 요오 부군수 류위안(劉元)을 암살하고 자신의 부하 중 한 명을 지원했던 바오이 서킷(保義, 현대 산멘샤에 본사를 둔 서킷)을 시작으로 많은 서킷들이 요오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n, 자오희(子趙, 趙暉)는 요오에 반기를 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류지위안은 헤동에서 황제를 선포했다(초기에는 국가의 새로운 명칭이 없었지만 후에 후한으로 알려져 있다). 류가 스스로 황제로 선포한 후, 리오에 저항하는 많은 회로들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여기에는 많은 농군 반군이 포함돼 있어 타이종 황제가 "중국인들이 이렇게 통치하기 어려운 줄 몰랐다"고 한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는 군사령관들 중 몇 명을 그들을 호위하는 리아오 병사들과 함께 그들의 서킷으로 돌려보냈지만, 이러한 반란들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13]

이러한 반란에 대처하는 데 진력이 난 늦은 봄, 타이종 황제는 달리앙의 관리들을 소집하여 그들에게 "곧 여름이 된다. 내가 남기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황후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대제국으로 돌아가자. 여기에 믿을 만한 사람을 남겨두고 군수가 되겠다고 말했다. 그는 후진 황실 관리들을 통째로 데리고 갈 준비를 하였으나, 그렇게 하면 달랑의 정세가 걷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충고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머지 관리들은 달랑에 맡기고, 존경받는 관리들만 데리고 갔다. 그는 시동생(샤오웬의 동생) 샤오한(小漢)을 쉬안우회로(武,, 달리앙에 본사를 두고, 샤오한(小漢)[13]을 군수로 임명하고, 달리앙에서 직접 철수시키면서 샤오에게 달리앙을 맡겼다.

랴오 본국으로의 귀환 시도와 죽음

태종황제가 물러가자 황하를 건너면서 탄식하며 "내가 대제국에 있을 때 총을 쏘고 사냥하는 것이 기뻤다. 대신에 나는 그것 없이 여기서 슬퍼. 이제 대제국으로 돌아가니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군대 때문에 황폐한 도시를 누비며 "내가 이 모든 일을 중국에 한 것은 옌볜 왕자[즉, 자오옌서우]의 잘못"이라고 한탄했다. 그는 또한 이 또한 자신의 관직인 장리의 공로라고 평했다.[13]

그러나 다이종 황제가 달리앙을 떠난 것은 한족 반란군을 계속 대담하게 만들었을 뿐, 곧 허양(河陽, 현대 뤄양)의 핵심 황하포드가 함락되었다. 그는 허양의 함락 소식을 듣고 이렇게 탄식했다.[13]

내가 세 번의 실수를 저질렀으니, 왕국이 내게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이 옳았다! 첫째, 나는 서킷에서 돈을 추출했다. 둘째, 대제국의 군사들이 풀씨를 털어버리게 했다. 셋째, 나는 군 지도자들이 그들의 회로로 더 빨리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러던 중 타이종 황제의 열차가 린청(林淸, 현대 싱타이)에 도착하자 그는 병이 나기 시작했다. 뤄안청( (安, 현대 시자좡)에 이르렀을 무렵 그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고, 가슴과 복부, 팔다리에 얼음이 쌓이고 얼음을 씹으며 열을 삭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죽었다. 거란 장군들은 계속 북쪽으로 수송할 수 있도록 복부를 벌려 소금으로 채웠다. 한씨는 그를 비꼬아 "건륭제"라고 불렀다. 거란족들은 조카(엘뤼 베이의 아들) 옐뤼안을 지지하여 황제로 즉위시켰고(시종 황제로), 시종황제는 도전과 싸워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으며, 처음에는 자오옌쇼우(쟈오옌쇼우)가 평준화시킨 뒤, 이후 황후 슐뤼( andü)와 옐뤼 리후( yel yel)가 평준화하였다.[13] 그러나 리오는 태종 황제가 후진으로부터 압류한 땅을 유지할 수 없었고, 결국 모두 류지위안의 후한 주의 일부가 되었다.[14]

하렘

  • 샤오원, 소씨 일족의 진간황후(?–935) (;ong安 安皇后 ;); 타이종의 첫째 사촌.
    • 첫째 아들 옐뤼 징은 쇼안의 왕자(931–969)가 되어 요의 무종이 된다.
    • 둘째 아들 옐뤼 옌체게(935–972년)는 타이핑의 왕자(935–972년)로 진징황부(秦慶皇府)로 영예를 안았다.
  • 궁녀 샤오(宮人 蕭氏)
    • 셋째 아들 옐뤼 티안데(?–948) ( (耶律天)
    • 넷째 아들 옐뤼 딜리(Yelü Dilie), 지의 왕자(?–979) (耶律敌烈 冀王)
    • 다섯째 아들 옐뤼 비셰(Yellü Bishe), 유에 왕자(?-973) (耶律必摄 越王)
  • 알 수 없는
    • 첫째 딸 옐뤼 뤼부구, 옌주 공주 (耶律吕古 燕国主)
    • 둘째 딸 옐뤼 차오구이(耶律嘲瑰)

조상

옐뤼 살레이드
옐뤼 윤데시
옐뤼 살라디
옐뤼 아바오지(872–926)
야오니아 틸라
샤오옌무진 (dd. 933)
요 천황(902–947년)
슐루 바이닝
슐루 셴시
슐뤼 포구
슐루핑(879-953)
옐뤼 윤데시
레이디 옐뤼

참조

  1. ^ a b c d e f 역사, 제3권.
  2. ^ a b c d e 지즈 통지안, 제275권.
  3. ^ 지즈통젠의 보양판, 제68권 [926년]
  4. ^ 랴오 역사는 타이종 황제에 자진하여 왕위를 내준 사람이 옐뤼 베이라는 곳까지 설명했지만, 그것은 그의 이후의 행동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요의 역사, 제72권을 참조하라.
  5. ^ 지즈 통지안, 제277권.
  6. ^ 리오의 역사, 제71권.
  7. ^ a b c d e 지즈 통지안, 제280권.
  8. ^ a b c d 지즈 통지안, 제281권.
  9. ^ a b 지즈 통지안, 제282권.
  10. ^ a b c d e f g 지즈 통지안, 제283권.
  11. ^ a b c 지즈 통지안, 제284권.
  12. ^ a b 지즈 통지안, 제285권.
  13. ^ a b c d e f g h 지즈 통지안, 제286권.
  14. ^ 지즈 통지안, 제287권.
  • Mote, F.W. (1999). Imperial China: 900-1800. Harvard University Press. pp. 49–52, 64–67. ISBN 0-674-01212-7.
  • 리오역사, 3, 4권.
  • 지즈 통젠, vols. 275, 277, 280, 281, 282, 283, 284, 285, 286.
요 태종
옐위 가문(915–1125)
출생: 902년 사망: 947년
섭정 직함
선행자 요나라의 황제
927–947
성공자
선행자 중국의 황제(베이징/톈진/북허베이/산시 북부)
937–947
선행자 중화인민공화국의 황제 (중앙)
947
중국의 천황(중앙산시)
947
성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