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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지봉유설/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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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理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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兪琰曰。皇天后土。皇。大也。后與厚通。今后土夫人祠。부인상(婦人像)을 빚다. 非也。《좌전》(左傳)에 이르기를 공공씨(共工氏)는 아들이 있었는데 구룡(句龍)이라 일컬었다. 爲后土。古者謂天子爲元后。又有后夔后稷之稱。則以后土爲婦人者謬矣。然漢書禮樂志。地祇。謂之富媼。其以媼稱何也。釋者以爲稱坤爲母之義。未知是否。 博物志云地以名山爲輔佐。石爲骨川爲脈。草木爲毛土爲肉。三尺以上爲糞。以下爲地。如所謂糞土之墻。糞字蓋此義也。

회남자》(淮南子)에 이르기를, 지형의 동서를 위(緯)라 하고 남북을 경(經)이라 한다. 山爲積德。川爲積刑。高者爲生。下者爲死。丘陵爲牡。谿谷爲牝。後人以谷爲牝此也。

邵康節曰。極南大暑。極北大寒。故南融北結。萬物之死地也。余謂生因於死。死因於生。氣屈則伸。陽剝則復。雖當寒沍之時。生意未嘗息滅。則其所謂死地。卽所謂生地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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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기》(述異記)에 이르기를, “반고씨(盤古氏)는 천지만물의 조상이다. 그가 죽자 머리는 오악(五岳)이 되고, 눈은 일월(日月)이 되고 脂膏爲江海。毛髮爲草木。”라 한다. 또는 이르기를, “머리는 동악(東岳)이 되고, 배는 중악(中岳)이 되고, 왼팔은 남악(南岳)이 되고, 오른팔은 북악(北岳)이 되고, 다리는 서악(西岳)이 되었다.”라 한다. 내가 여기에서 특히 중국에 관하여 말하자면, 若曰頭爲崑崙。足爲白頭山可也。

습유기》(拾遺記)에 이르기를, 扶桑五萬里。有磅磄山。上有桃樹百圍。만년(萬年)에 열매 하나가 (열린다.) 울수(欝水)는 방당산(磅磄山) 동쪽에 있다. 生碧藕長千常。故有萬歲冰桃。千常碧藕之說。余意磅磄與方丈音相近。俗謂智異山爲方丈山。또한, 세전(世傳)하기를, 옛날에 어떤 사람이 고성(高城) 해변에서 수중(水中)에 누운 돌을 보았다. 題曰方丈山碑。以此或疑金剛亦號方丈山云。所謂欝水。恐指欝陵島而言。按八尺爲尋。倍尋爲常。一云七尺爲常。

《습유기》에 이르기를, 蓬萊山高二萬里。물이 앝아, 금옥(金玉)과 같은 세석(細石)이 있다. 不加陶冶。自然光淨。동쪽에 울이국(欝夷國)이 있다고 한다. 所謂細石。지금의 기자(碁子)의 부류와 유사하다. 而欝夷與欝陵島音相近。欝陵亦古國名。王維送日本晁監序曰。扶桑若薺。欝島如萍此也。又曰圓嶠山上有方湖。周廻千里。今漢拏山上有深池。世謂漢挐爲圓嶠者。蓋有據矣。 按韻書曰。禹迹之內。有三崆峒。黃帝問道處在汝州。杜詩崆峒小麥熟。在臨洮。又其一在安定云。而薊州之崆峒山不與焉。진자앙(陳子昂)의 시(詩)에 따르면, 曰。北登薊丘望。求古軒轅臺。尚想廣成子。遺迹白雲隈。자앙이 어찌 생각하는 바 없이 말했겠는가? 黃帝都涿鹿。涿鹿今幽州。幽州去薊門近。則子昂之說似是。

張翰翔曰。赤壁雖有名。景則不如名。第因眉山二賦。遂勝千古耳。余聞魯訒言在中朝。親見滕王閣。頗不如所聞云。是豈獨赤壁乎哉。按三才圖會曰。赤壁磯在黃州。蘇軾遊此。以爲曹操敗走處非也。赤壁乃在武昌樊口云。余謂以蘇之博雅。而猶不知此。何耶。

주자(朱子)가 객(客)과 풍수(風水)를 얘기하였다. 因曰冀州好一風水。岱嶽靑龍也。華山白虎也。嵩山案也。淮南諸山。案外山也。與術者之見異矣。

《완위여편》(宛委餘編)에 이르기를, 동악(東嶽) 광상산(廣桑山)은 동해 가운데에 있고, 남악(南嶽) 장리산(長離山)은 남해 가운데에 있고, 서악(西嶽) 여농산(麗農山)은 서해 가운데에 있고, 북악(北嶽) 광야산(廣野山)은 북해 가운데 있고, 중악(中嶽) 곤륜산(崑崙山)은 구해(九海) 가운데에 있다. 爲天地心。此五大嶽也。方壺山鍾山在北海。부상산(扶桑山)·봉래산(蓬萊山)·옥초산(沃焦山)은 동해에 있고, 연석산(連石山)은 동남에 있고, 方丈山圓嶠山岱輿山。俱在大海中。酆都山在九壘之下。玄洲在北海中。영주(瀛洲)·목주(穆洲)·조주(祖洲)는 동해 가운데에 있다. 鳳麟洲聚窟洲生洲在西海中。炎洲在南海中。元洲長洲俱在大海中。滄海島在大海中。高五萬里。皆神仙所居。또한, 《습유기》에 이르기를, 대여(岱輿)·원교(圓嶠)·방호(方壺)·영주(瀛洲)·봉래(蓬萊)의 오산(五山)은 바다 동쪽에 있다 한다. 按廣桑山。雜書所謂孔子爲太極上眞公。主廣桑山是也。鍾山有龍啣火照天門是也。十洲。西王母所謂巨海十洲。人跡罕到者也。以此觀之。申功言天下名山八。三在蠻夷。五在中國。其所見。豈不偏且小哉。

王世貞曰。今天下。二華不如峨眉。衡嶽不如武當。嵩少一培塿耳。而崑崙天柱。以要荒棄之。雖然。是寧獨山而已哉。余謂我東人名能文詞者。無讓於中華。而華人以要荒視之。一無傳道之者。噫。豈唯山哉。豈唯山哉。

三才圖會記本國山川。曰大興洞朴淵。皆在天磨聖居兩山之間。昔有朴進士者吹笛淵上。龍女感之。引以爲夫。故名朴淵。오관산(五冠山)은 장단부(長湍府) 서쪽에 있다. 有五峰團圓如冠。俗離山在報恩縣。有文藏臺法住寺。冰山在義城縣。動石在九井峯下。靑鶴洞在智異山中。諺傳崔致遠所遊處。三日浦在高城郡。寒溪山在麟蹄縣。形勝甲於嶺西。萬瀑洞在金剛山中。洞有普德窟。鑿絶壁。立銅柱於外。以構小屋三楹於其上。拘以鐵鎖。釘于巖石。浮在空中。祥雲亭傍海。키가 큰 소나무가 십리를 연달아 있다. 仰不見白日。叢石亭在通川郡北。영남루(嶺南樓)는 밀양부(密陽府)에 있다.館東勝覽。爲嶺南第一云。我東山川樓觀之勝。不止於此。而圖會所載。特出於傳聞。故疏略如此。

세상 사람들이 이르는 삼산(三山)은 곧 우리나라에 있으니, 금강(金剛)이 봉래(蓬萊), 지리(智異)가 방장(方丈), 한라(漢挐)가 영주(瀛洲)이다.[1] 以杜詩方丈三韓外證之。余謂三神山之說。出於徐福。서복은 일본에 들어가 죽어서 신이 되었다. 곧, 삼산은 마땅히 동해의 동쪽에 있어야 한다. 노두(老杜)는 방장이 삼한(三韓)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고, 삼한 외에 있다고 말했다. 其言宜可信也。

우리나라의 모든 산은 백두산(白頭山)에서 전부 발원(發源)하여, 마천령(磨天嶺)·철령(鐵嶺)으로부터 남쪽으로 금강·오대(五臺)·태백(太白)이 되고, 지리에 이르러 다한다. 南師古常言白頭山脈。不應到此而止。當是隱伏海中。爲日本諸島云。其說有理。今濟州漢挐。亦其一也。

요사》(遼史) 〈지리지〉에 이르기를, 장백산(長白山)은 냉산(冷山) 동남쪽 천여리에 있다. 그 산의 금수(禽獸)는 모두 하얗다. 사람이 감히 들어가지 않는다. 그 사이를 더럽힐까봐 두려워서 以致蛇虺之害。흑수(黑水)가 여기서 발원하니 곧 혼동강(混同江)이다. 대목(大木)을 갈라 배〔舟〕로 삼는데, 모습이 〔梭〕과 같아서, 북 배〔梭船〕라고 하니, 곧 지금의 마상이이다. 또한, 《오학편(吾學編)》[2]에 이르기를, 長白山橫瓦千里。高二百里。巓上有潭周八十里。南流爲鴨綠。北爲混同。按長白山。蓋白頭山。以四時冰雪常白故名。

通典云匈奴歌曰失我焉支山。使我婦人無顔色。說郛曰。焉支。閼支也。又云今燕脂此山出。紅藍可爲燕脂。閼支以爲飾。故失之則婦人無顔色也。

智異山亦號頭流。白頭山之脈流至此故云。혹은, 그 맥(脈)이 바다에 이르러 다하고, 여기에서 정류(停留)하니, "두류(頭留)"라고 이름지었다 한다. 이를 또한 방장(方丈)이라고도 부른다. 《통감집람》(通鑑輯覽)에 이르기를 방장은 대방군(帶方郡)의 남쪽에 있다. 그 대방이라는 이름은 또한 방장으로 인하여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楓嶽俗號皆骨。僧謂之金剛。亦名涅槃。或曰怾怛。亦曰眾香城。《화엄경》(華嚴經)에 의하면, 동북해 가운데에 금강산(金剛山)이 있다 한다. 一萬二千曇無竭菩薩常住其中。金安國詩云永郞風月三千首。無竭雲烟一萬峯是也。 中國人有曰願生高麗國。親見金剛山。金剛山之名於天下久矣。然我國之人。相去數百里間。而不果遊者多矣。申企齋亦云少時多病今傷老。辜負名山此百年。頃歲東征天將等問金剛遠近。或欲往見。而辭以僻遠。故不克行。

한라산(漢挐山)은 원산(圓山)이라고도 하며, 제주(濟州)에 있다. 以峰上皆平故名。세전(世傳)하기를, 그 산정(山頂)에 오르면 노인성(老人星)을 내려다볼 수 있다 한다. 그것은 등불처럼 크다. 山頂積雪。盛夏不消。큰 못이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輿地勝覽曰。卽圓嶠山也。然則以漢挐爲瀛洲山者非也。한라 서북쪽에 산 하나가 별도로 있는데, 이름하여 영주산(瀛洲山)이다. 그리하여 제주를 일컬어 동영주(東瀛洲)라 한다. 又瑞山。高麗時自海中湧出。周四十里。山無草木。지금 대정현(大靜縣)에 있다.

伽倻海印寺之洞曰紅流洞。洞口有武陵橋。又有崔致遠題詩石。詩曰“狂噴疊石吼重巒。人語難分咫尺間。常恐是非聲到耳。故敎流水盡籠山。” 又智異山神興寺洞。亦謂紅流洞。

智異山靑鶴洞。舊有靑鶴栖止故名。前朝李仁老至神興寺。尋靑鶴洞不得。有詩曰策杖欲尋靑鶴洞。隔林空聽白猿啼。洞之得名蓋久矣。居僧爲余言。平時有俠少投石傷鶴翅。鶴由此不復來。未幾有壬辰之亂。蓋見幾而作也。

松嶽初名扶蘇。或稱鵠嶺。或稱神嵩。以栽松故名松嶽。所謂鵠嶺靑松此也。尹紹宗詩蒼蒼萬古扶蘇山。許琛詩扶蘇王氣欲沈淪。皆指松嶽耳。又扶蘇山在扶餘。李穀扶餘懷古詩。扶蘇山下徒立國是也。 輿地勝覽曰。方巖在漢挐山絶頂人跡不到處。其形方正。如人鑿成。其下莎草成蹊。怳聞絃管之聲。莫知所從來。世傳神仙恒遊之所。又曰旌義金寧咸德。多神仙云。金寧咸德。亦濟州屬縣名。

淸風郡治。有屛風山。山有穴方二尺許。風氣甚烈。雖盛暑之日。猶覺寒凜。名風穴。穴中空曠。其深不知幾里可攀緣以入。以火燭之。石罅多有石髓可食。取出穴外則堅凝爲石。按荊州記云宜都狼山。구멍이 있는데 입구 크기가 수 척이다. 爲風井。宋玉風賦曰。風起於靑蘋之末。盛怒於土囊之口。註。土囊。大穴也。蓋此類也。

義城縣有冰山。中有石穴。穴口三尺。爲風穴。또한 바위 아래에 구멍이 있는데, 넓이가 한 자이다. 立夏後冰始凝。極熱則冰堅。霾雨則冰釋。春秋不寒不熱。冬則溫氣如春。謂之冰穴。義興縣華山。亦有風穴甚寒。每夏冰結。異哉。

雲峰八良峴。有血巖。乃我太祖勦殲拔都之地。石上斑血。至今若新漬。壬辰歲。巖血流而倭寇至。怪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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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源志曰。河源在吐蕃西鄙。有泉百餘。泓方可七八十里。沮洳泥淖。弱不勝人跡。望之燦若列星。故名星宿海也。按河源自星宿海。行半月至崑崙。則古稱河出崑崙者妄也。在胡元時。西域諸國。無遠不通。故遣使窮河源所出而爲此志。則其言宜可信也。

주자(朱子)는 황하(黃河) 및 장강(長江), 압록강(鴨綠江)을 천하의 삼대 강이라고 여겼다. 생각컨대 압록강은 백두산으로부터 수천리를 가고, 分派爲三江。西南入于海。그 발원(發源)이 심히 멀다. 그리하여 이를 대수(大水)라 일컫는다.

우리나라의 소위, 패수(浿水)는 셋이 있다. 其一。《한서》(漢書)에 이르기를, “한(漢)나라가 일어났지만, [...] 요동의 옛 요새를 고쳐, 패수(浿水)에 이르기까지를 경계로 삼아, [...] 또, 위만이 망명하여 패수를 건넜다.”[3]하였으니, 卽今之鴨綠江也。其一。《당사》(唐史)에서 평양성 남쪽의 패수(浿水)라고 일컬었으니, 곧 지금의 대동강(大同江)이 그 하나이다. 東國史謂百濟疆域。北至浿河。卽今猪灘也。《전국책》(戰國策)에 따르면, 아침에 동거(東莒)에서 쏘고, 저녁에 패구(浿丘)에서 쏜다 하였으니, 아마도 우리나라의 패수(浿水)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천자문》(千字文)의 금생여수(金生麗水). 혹자는 여수의 여(麗)자가 즉 고려(高麗)라고 말한다. 蓋以三叉河一名遼水。舊屬高麗故云。今按韓子曰荊南麗水生金。又考杜氏通典。南方有麗水縣。乃知其文本出於此。

河者。北方流水之通名。故自遼抵燕都一路。有八渡河,甕北河,三叉河,大小凌河,沙河,深河,灤河,潞河,玉河。皆以河稱焉。我國之猪灘。舊稱浿河。蓋亦以此。

우리나라의 온천은 경기·전라도를 제외하고는 없는 곳이 없다. 평산(平山)·연안(延安)·온양(溫陽)·이천(伊川)·고성(高城)·동래(東萊)가 가장 저명하다. 속전(俗傳)(에 의하면,) 세종대왕에게는 안질(眼疾)이 있었다. 중사(中使)에게 명하여 제도(諸道)의 온수를 취수하여 양을 재게 하니, 곧, 이천 갈산(葛山)의 온수가 가장 무거웠다. 乃親幸沐浴良驗。그러므로 갈산온천이 제일이라 한다.

椒井多有之。廣州淸安等處最有名。每七八月。有椒氣甚烈。병인(病人)이 목욕하면, 자못 기효(奇效)가 있다. 按本草。온천 아래에 유황이 있으므로 물이 뜨겁다. 醫鑑曰。냉천(冷泉) 아래에 백반(白礬)이 있다. 故水味酸澁冷洌。所謂冷泉。卽今椒水也。 海州有鳴川。以餞別之地故名。昔有人於此別妓。妓不泣。乃作詩曰水有鳴川水。人無泣別人。那將橋下水。沾却美人巾。

큰 나루가 경기·충청 사이에 있는데, 수로로 30리이다. 가운데에 대석(大石)이 있어 舟觸則碎。俗號賽神令公。행인(行人)은 반드시 향(香)불로 기축(祈祝)한다. 賽神之稱。蓋以此。而謂之令公則未知其義。或疑令公。卽靈君云。

半山詩云十月寒江正復艚。按 정월수(正月水)를 해동수(解凍水)라 일컫고, 이월(二月)은 曰白蘋水。三月曰桃花水。四月曰瓜蔓水。五月曰麥黃水。六月曰山樊水。七月曰豆花水。八月曰荻苗水。九月曰霜降水。十月曰復艚水。十一月曰走凌水。十二月曰蹙凌水。廋信詩春水望桃花。張志和詩桃花流水鱖魚肥。亦此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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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聞錄曰。땅의 형세가 서북은 높고, 동남은 낮다. 소위 동북남(東北南)의 삼해(三海)라 하나, 그 실질은 하나이다. 無所謂西海者。經傳所載四海。蓋引類而言。甘英往條支臨大海。蓋卽南海之西也。漢西域傳所云蒲類海。疑亦停居一澤。或言卽星宿海。非西海也。余謂世所稱四海。只據中國而言。非天地間之四海也。若考三才圖會則可知。

夷堅志曰。영해현(寧海縣)의 동해 가운데에 미려(尾閭)가 있다. 其水湍急。陷爲大渦者十餘。舟楫不可近。아마도 동해의 물이 앝은 곳인 것 같다. 按寧海。卽浙江台州屬縣也。莊子尾閭泄之註。尾閭一名沃焦。一石方圓四萬里。海水注之無不燋。此兩說。似不同。

고인(古人)의 시문(詩文) 중의 소위, 벽해(碧海)란 대개 동해를 가리켜 말한다. 按十洲記。동쪽에 벽수(碧水)가 있는데 짜거나 쓰지 않다. 正作碧色。《산해경》(山海經)에 이르기를, “부상(扶桑)이 벽해(碧海) 가운데에 있고, 또, 동해 역시 창해(滄海)라 부른다” 한다. 列仙傳云巨鰲背負蓬萊之山。抃舞戲滄海之中。是也。今人混稱則非也。

輿地勝覽稱京都爲左控關嶺。右環渤海。董越朝鮮賦。稱海西曰北接慈悲。南臨渤海。倪謙太平館賦曰漢江蕩潏。渤海攸歸。按博物志。동해를 모두 발해(渤海)라 칭한다. 南海之別有漲海。西海之中有靑海。北海之別有瀚海。아마도 우리나라의 서해는 곧 중국의 동해이니, 곧 발해라고 통칭하는 것 같다.

중국의 동해는 곧 우리나라의 서해이다. 其有潮汐固矣。우리나라의 동해는 본래 조석(潮汐)이 없다. 是理外難知之事。而歷世無論辨之者。中國之人。未嘗見我國東海故也。楊生萬世。乃東海居人。爲余言北海自北而流下至東海。晝夜不止。故雖風靜之日。波聲遠聞。장류(長流)의 물은 조석(潮汐)이 없다. 其勢然矣。不足怪也云。

섬라국(暹羅國) 지도를 본 적이 있는데, 동남해 가운데에 有萬里長沙,萬里石塘。連瓦回抱。崔溥漂海錄所謂在濟州望見白海者。疑卽此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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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橫義士死海島中。後人哀之。號曰嗚呼島。俗傳洪州海中。有芿叱盆島。乃是嗚呼島云。蓋以方言芿叱盆。近於嗚呼之義。故附會而爲之說也。昔國初朝京使臣。過半洋山舟敗云。半洋山在嗚呼島。蓋距我境爲遠耳。

울릉도(欝陵島)를 일명 무릉(武陵) (또한) 일명 우릉(羽陵)이라 한다. 동해 가운데 있고, 울진현(蔚珍縣)과 마주하고 있다. 섬 가운데에 큰 산이 있다. 地方百里。風便二日可到。新羅智證王時。號于山國。降新羅納土貢。高麗太祖時。도인(島人)이 방물(方物)을 바쳤다. 我太宗朝。遣按撫使。刷出流民空其地。地沃饒。대나무가 막대처럼 크고, 쥐가 고양이처럼 크며, 복숭아 씨가 한 되보다 크다. 壬辰變後。人有往見者。亦被倭焚掠。無復人烟。近聞倭奴占據礒竹島。或謂磯竹。卽蔚陵島也。

삼봉도(三峰島) 또한 동해 가운데에 있다. 成廟朝。人有告之者。遣朴元宗往探。因風濤不得泊。還過欝陵島云。《산해경》(山海經)所謂蓬萊山。有溟海。無風而洪波百丈。惟飛仙能到者。蓋以東北海風濤甚險故云。

海浪島於我國爲近。中朝及我國人。逃入本島。漸至滋蔓。燕山朝。遣田霖搜括島內遼東人六十四名本國人四十八名。自頃年來。海賊出沒寇抄。兩西至湖南。無月不被其害。朝廷於白翎島安興梁。設鎭以備之。其禍稍息。然後日之患。有可慮者。

羅州有黑山島。按宋史。自明州定海縣。遇便風三日入洋。又五日抵黑山云。以此知我國南邊。與中國之江浙。只隔一海而近矣。

萬曆丁亥。倭犯全羅道。鹿島萬戶李大元。以孤軍逆戰于損竹島。援絶敗死。국인(國人)들이 이를 슬퍼하였다. 손죽도(損大島)를 세간에서는 손대도(損大島)라고 부른다. 이는 방음(方音)은 죽(竹)을 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與落鳳坡。同一讖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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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東部) 천달방(泉達坊)。有井泉甚美。주민들이 자고(自古)로 많이 노수(老壽)하였다. 坊之得名。蓋以此云。 城中水味。以於義洞宜城尉宅中井水爲第一。成廟封其井。汲取以進。謂之御井。後賜宜城。故刻賜井二字於井甃石上。至今猶存。頃年唐官萬經理,邢軍門。皆以此井爲第一。令人日汲以飮云。 平壤城中。舊無井泉。辛卯年。權徵爲監司。수 길〔丈〕 넘게 우물을 파도 물을 얻을 수 없었다. 乃有大磐石。鑿石而泉出。其中有鮒魚及蓮子。其理不可知也。術者言地理。平壤城爲橫舟形。鑿井則有禍。翌年倭寇至。정수(井水)의 맛이 써서, 사람들 또한 먹을 수 없었다.

頃年李慶深爲統制使時。欲設營於固城地。아랫 사람을 시켜 열 여 길 깊이로 우물을 팠으나, 물이 없었다. 下有磐石。用斧穿破。則中有瓦五六張。其下又有磐石。不得鑿破。或疑開闢前物也。又近歲黃州築城時。伐取山石。돌 속에서 작은 불상(佛像) 하나를 얻었다. 此尤理之不可知者。按朱子曰。嘗見高山有螺蜯殼。或生石中。此石卽舊日之土。螺蜯卽水中之物。下者却變而爲高。柔者却變而爲剛也。是則然矣。

고려(高麗)의 이름은 산이 높고〔高〕 물은 아름답다〔麗〕는 것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則宜作去聲。而韻書作平音。未知何義也。中朝一路。有高麗村,高麗舖。又遼東館中。고려정(高麗井)이 있는데, 상전(相傳)하기를, 고려의 인마(人馬)가 들어가면, 비록 가뭄에도 정수(井水)가 반드시 흘러 넘치고 마르지 않으니 붙여진 이름이다. 且日本武莊州。有高麗郡。攝津州。有百濟郡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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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秦傳負郭田二頃。按六尺爲步。二百四十步爲畝。百畝爲頃。或曰百步爲畝。又田中溝曰畝。田間道曰畛曰陌。萊田曰畹曰畦曰畔曰町。

箕子井田。在平壤南門外。田中有井。名曰箕子井。韓久庵百謙。欲究其制。乃은(殷)나라·주(周)나라의 보수(步數)의 이동(異同)과 척촌(尺寸)의 장단(長短)을 조사하다. 逐畝折算。辨其區畫。則每區七十畝。各爲小界限。而縱橫皆八。64구(區)를 통틀어 헤아려 하나의 큰 계한(界限)으로 하였다. 方方正正。延袤數里。含毬正陽兩門之間。最爲分明。乃作井田說。以明殷周田制之不同。其篤於好古如此。噫自秦開阡陌而井田之制無復可尋。孰謂殷制之在我東者。其遺蹟歷數千載而不泯耶。然非久庵則孰知其詳若此乎。尤足尚已。

雲谷雜記曰。沅湘間多山。農家植粟。多在岡阜。伐其林木。縱火焚之。俟其成灰。卽布種。如是則必倍收。所謂刀耕火種也。今我國山郡亦如此。謂之火田。

남만(南蠻)에 수전(水田)이 많다. 謂五畝爲一雙。按王弇州云買兩拳角犢墾十雙此也。

왜국은 전(田)을 전(畠)이라 하고, 수전을 전(田)이라 하며, 화전을 전(畑)이라 한다. 猶 우리나라는 수전을 답(畓)이라 한다. 故官名有畠山殿。地名有畑島云。

諸國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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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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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東方)의 땅은 수천리를 넘지 않는다. 而三國以前。有五十國之多。何耶。夫以中國之大也。而上古得百里之國萬區。至周尚有千八百國。東方三國以前。猶上古也。其有五十國無怪矣。

사기》(史記)(에 의하면[4],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眞番)·임둔(臨屯)·낙랑(樂浪)·현도(玄菟)의 사군(四郡)으로 삼았다. 소제(昭帝)는 아울러 낙랑·현도의 이군으로 삼았으니, 대개 한나라가 정한 바이다. 이는 위만(衛滿)이 웅거하였던 땅이지, 우리나라 전국토인 것은 아니다. 按東史。낙랑은 지금의 평양(平壤)이고, 임둔은 지금의 강릉(江陵)이다. 현도는 옛 동옥저(東沃沮)이고, 지금의 함경도 땅이다. 眞番治霅縣云。今不詳其處。然考諸杜氏通典。則眞番當在遼界耳。

一統志曰。朝鮮漢末。爲公孫度所據。至孫淵魏滅之。晉末。陷入高麗云。공손도(公孫度)가 근거를 삼은 곳은 곧 요동(遼東)이지 조선 전체 땅이 아니다. 진(晉)나라 영가(永嘉) 말에 요동은 고구려가 취한 바가 되었다. 志不曰遼東而曰朝鮮。乃記者不詳也。

丸都城。今不詳其處。或言寧遠劍山是也。蓋俗謂劍爲丸都故也。按綱目註。高句麗都於丸都之下。多大山深谷。又唐志。自鴨綠江口舟行百餘里。또한, 작은 방주(方舟)가 거슬러 올라가 동북쪽으로 오백리를 가면 환도성(丸都城)에 이른다고 한다.

按東史。백제의 국토는 동쪽으로는 지리산(智異山)에 이르고, 남서쪽으로는 대해(大海)와 경계를 이룬다. 北抵漢江。又溫祚王時。以浿江爲界。卽今平山府猪灘云。蓋初界猪灘而後界漢水也。祈順詩曰百濟地形臨水盡者是也。

동국사(東國史)에서 일컫는 부여국(扶餘國)은 지금 그 소재를 알지 못하나, 사서(史書)를 조사해 보니, 곧, 동옥저(東沃沮)는 북쪽으로 부여와 접해 있고, 남쪽으로 예맥(濊貊)과 접해 있다. 又扶餘王讓高句麗曰。我先王與先君東明相好。而乃誘我臣僚。逃至于南以立國云。또한, 고구려는 장성(長城)을 쌓았다. 北自扶餘。南至海千有餘里。則扶餘國在高句麗之北界明矣。按遼史。扶餘城後爲渤海所都。今黃龍府是也。又百濟移都泗泚。國號南扶餘。泗泚今扶餘縣也。與此不同。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이후에 비로소 삼한(三韓)이라는 명칭이 있었는데, 그 설명은 같지 않다.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변한(卞韓)은 남쪽에 있고,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고,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었다”고 이른다.[5] 世謂, 마한(馬韓)은 즉금의 전라도이고, 변한은 즉금의 충청도이며, 진한(辰韓), 일명 진한(溱韓)은 즉금의 경상도라고 한다. 또는 마한이 최대이고 전라도와 충청도이며, 변한과 진한은 모두 경상도에 있었다고 말한다. 或言京畿,忠淸,黃海等道爲馬韓。全羅道爲卞韓。慶尚道爲辰韓。未知孰是。然以史記觀之。則後說似近矣。此外又有濊國今江陵。貊國今春川。以此推之。기자는 책봉되었다. 衛滿所據。皆平壤近地。三韓則不能悉有之也。

《위략》(魏畧)에 이르기를, 기자의 사십여세 후손인 조선후(朝鮮侯) 준(準)이 왕호를 참칭하였다고 운운하였다. 輿地勝覽所謂朝鮮武康王。卽箕準也。蓋朝鮮至箕準始稱王。避衛滿至馬韓開國。後爲百濟始祖溫祚幷之。是西漢末也。

東史。衛滿據王儉城。註王儉城今平壤。古仙人王儉宅也。輿地勝覽云古記。檀君名王儉。馬史。作王險。未知孰是。

신라는 거의 일천년, 나라를 누렸다. 至其中葉。統合三韓。時和歲豐。사람들은 성대(聖代)라고 일컬었다. 諺稱新羅聖代者此也。

《산해경》(山海經)에 이르기를, “해동(海東)에 군자(君子)의 나라가 있다. 衣冠帶劍。好讓不爭。有堇花草朝生夕死。”라 한다. 又古今記曰。군자의 나라의 지방은 천리이다. 多木槿花。당나라 현종(玄宗)이 이른 바에 따르면, 신라를 군자의 나라라고 불렀다. 且高麗時表詞。稱本國爲槿花鄕。蓋以此也。

東方朔神異記曰。東方有人焉。男皆縞帶玄冠。女皆采衣。恒恭坐而不相犯。相譽而不相毁。見人有患。投死救之。倉卒見之如癡。名曰善人。余謂東方蓋指我國。而善人之風。今不得而見矣。安得與斯人爲友也哉。

《수서》(隋書) 배구()(裴矩傳)에 말하기를, 고구려〔高麗〕의 땅은 본래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나라가 이로써 기자(箕子)를 봉(封)하였다 한다. 此言未知所本。而輿地勝覽。李詹云孤竹國。今海州也。中朝永平府。有孤竹古城。而詹乃以海州爲孤竹。亦未知何據。按首陽山中。有孤竹郡舊基。無乃以此而附會其說耶。 唐書新羅傳曰。依居山谷。以草茨屋。董越朝鮮賦曰。凡爲城郭。皆枕高山。蓋中原則民居邑郭。皆在平地故云爾。

기자는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만들었다. 按漢書。相殺者以死償。相傷者以穀償。相盜者沒爲其家奴婢云。此八條中之三也。餘不可考。或疑幷五倫爲八條云。

漢書曰。馬韓人作土室形如冢。開戶向上云。我東土室之制亦久矣。 我國濟州之歌。北道之哭。嶺南之鄕音。於中國相近云。

外國

[편집]

안남국(安南國)은 중국의 서남쪽에 있다. 거리가 북경에서부터 13,000리이다. 진(秦)나라는 상군(象郡)으로 삼았고, 한(漢)나라는 교지군(交趾郡)을 두었다. 오대 십국 시대 말에 이르러, 레호안이 왕호(王號)를 참칭하기 시작하였으나, 명(明)나라 영락제(永樂帝) 시기에 그 땅을 평정하였다.[6] 동서로는 1,700리이고 남북으로는 2,700리이다. 뒤에 다시 배반하였다. 가정(嘉靖)[7]초에 막당중(莫登庸)이 임금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다. (그러나 명나라는 그가) 왕에 책봉됨을 허락하지 않았고, 안남도통사(都統使)로 칭하였다. 이에 오히려 그 나라의 황제를 자칭하였다. 《사문옥설》(事文玉屑)[8]에 이르기를 교지국(交趾國)을 일명 안남(安南)이라 하였으니, 곧, 고대 중국 남방민족의 전설 중의 신격화된 개〔瓠犬〕의 남겨진 종족이다. 그 성품은 간사(奸邪)하고 교활(狡猾)하고, 머리털을 깎고 맨발로 다닌다. 움펑눈에 입을 내밀고 (다니니), 매우 추악하다. 광동(廣東) 사람들은 일컫기를 (그들이) 오랑캐와 귀신 모양을 한, 사람과 비슷한 자들이라 하였다. 또한, 마원(馬援) 병사(兵士)의 남겨진 종족이기도 하다. 또한 라오스는 안남의 서남쪽에 있다. 옛 월상(越裳)의 나라이다. 또는 이르기를 곧, 애뢰국(哀牢國)이다. 《오학편(吾學編)》에 이르기를, “그 풍속(을 보자면) 이로(夷獠)족(族)과 뒤섞여 살고, 예의(禮儀)를 알지 못한다. 사납고 억세며, 싸우기를 좋아한다. 오직 환주(驩州)·연주(演州) 사람들만이 순박하고 빼어나며 학문을 좋아한다. 그 산천(山川)의 불적(佛跡)으로는 구루(句漏)[9]의 부랑강(富良江, sông Phú Lương)이 가장 크고, 월왕성(越王城)·천사관(天使館)·낭박주(浪泊柱)가 있다. 금·진주·말려서 저장해둔 과일·향료·무소·코끼리·무소 암컷·성성이·비비(狒狒)·흰 꿩·비치(翡翠)·잭푸르트가 산출된다.”하였다. 내가 북경에 다다랐을 (), 그 나라 사신을 다시 만났다. (그들은) 치아를 검게 물들이고, 머리는 풀어 헤쳤다. 문자는 조금 해석할 (수 있다.) 언어는 입의 소리에 맞게 쓴다. 움펑눈에 입을 내밀고 (다닌다는) 것은 (안남과) 비슷하다. 단, 모두 머리털을 풀어 헤치는데, 예전에 머리털을 자른 것과는 다르다.

유구(琉球)는 동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복건(福建) 매화소(梅花所)에서 바다로 출발하여 칠일이면 닿을 수 있다. 왕이 소박하게 산다. 금과 푸른 옥의 장식이 없다. 세금의 구실을 매기는 방법은 정전법(井田法)만큼이나 간략하다. 왕과 신하, 백성이 각기 땅을 나누고 이를 식록(食祿)으로 하였다. 상하간에 취하거나 거두는 것은 없다. 형벌을 씀이 매우 엄하다. 소라 껍데기로 부뚜막에 불을 지핀다. 사람들이 모두 날래고 건장하다. 의약을 알지 못하나 질병이 없다. 병기와 갑옷은 굳세고 날카롭다. 활을 쏘면 이백보에 이른다. 전쟁을 좋아하고 사납게 싸운다. 쉽게 사람을 베어 죽이는데, (그러면), 법도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곧, 할복하여 스스로 죽는다. 그 자연을 (살펴 보면), 자라와 악어의 섬, 팽호도(彭胡島)가 있다. 나라 서쪽의 고미산(古米山)은 몹시 험준하여, 배가 다가가면 번번이 부서진다. 산에 맹수가 없으므로, 야생마가 많다. 그 옆에는 비사사국(毗舍邪[10]國)이 있다. 섬 속의 하찮은 오랑캐의 조어(鳥語)는 귀형(鬼形)이니, 아마도 인류가 아닌 것 같다. 한창려(韓昌黎)의 〈송정상서서(送鄭尚書序)〉에서 말하는 유구(流求)는 곧 이것이다. 듣기로는 그 나라는 우리나라 제주의 남쪽에 있어, 맑은 날이면, 제주에서부터 희미하게 바라다 보인다고 믿는다 한다. 생각컨대, 해로(海路)가 몹시 멀지는 않은 것 뿐이리라.

슈리비자야〔三佛齊〕는 동남해(東南海) 가운데에 있다. 국토에는 15개 주가 있다. 동쪽으로는 자와〔爪哇〕와 떨어져 있고, 서쪽으로는 믈라카〔滿剌加〕와 떨어져 있다. 땅이 기름져 가색(稼穡)에 적합하다. 사람들이 수전(水戰)에 익숙하다. 복약하면 칼이 상처를 입힐 수 없으니, 적을 만나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아 인국은 이를 두려워 하였다. 물이 많고 땅이 적으므로 장령(將領)만이 뭍에서 살 수 있었고, 백성들은 대개 뗏목을 얽어 매고, 수중(水中)에는 들보와 기둥을 얽어 맸다. 글자는 범서(梵書)를 쓴다. 칠면조라는 것이 있는데 학보다 크고, 毛如靑羊食炭。또한 조법아국(又祖法兒, 도파르)은 해중(海中)에 있고, 타조가 산출되는데, 길이가 3~4척이고, 행함이 또한 이와 같다. 《완위여편》(宛委餘編)에 의하면, 서역의 큰 새를 타조라 하니, 아마도 이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점성(占城)은 옛 임읍(林邑)이다. 본래 한(漢)나라 상림현(象林縣)이었고, 마원(馬援)이 동주(銅柱)를 놓은 곳이다. 한나라 말에 이르러, 쿠리엔(Khu Liên, 區連)이 현령을 죽이고 왕을 칭하였다. 당나라 원화(元和) 초년(806년)에 점성국(占城國)이라 고쳐 불렀다. 대해(大海)의 남쪽에 있다. 남쪽으로는 진랍(眞臘)과 떨어져 있고, 서쪽으로는 교지(交趾)와 떨어져 있다. 사시(四時) 늘 덥기가 여름과 같다. 서리와 눈〔雪〕은 없다. 초목은 길고 푸르다. 습속은 사납고 억세며, 전투에서 과감하였다. 여자를 귀히 여기고 남자를 천대한다. 검은 색을 아름답다고 여긴다. 띠〔茅〕나 가시(나무로 엮은 집에) 사는데, 3척(尺)을 넘을 수 없다. 출입할 때 말과 코끼리를 탄다. 有尸頭蠻者。婦人也。夜飛頭入人家。食小兒穢氣。頭返合體如故。失其體不得合卽死。무소가 큰 것은 800근이고, 뿔 한 개가 코 끝에 있으며, 길이는 가히 1척 5촌이다. 말이 당나귀보다 작다. 당나라 태종(太宗) 때에 임읍은 오색 앵무(鸚鵡)를 바쳤다. 모두 그 곳의 토산품이다.

섬라(暹羅, 태국)는 둘레가 천리이고 해중(海中)에 있다. 群山峭拔環繞。地下濕。氣候嵐熱不齊。本暹與羅斛二國地。暹乃赤眉遺種。元至正間。비로소 합하여 일국(一國)이 되었다. 尚釋敎。婦人多智。夫聽於妻。喪禮。貴者灌水銀葬。民間鳥葬。수전(水戰)에 능숙하고, 구략(寇掠)하기를 좋아한다. 産寶石,奇香,獅,白象,白鼠,六足龜。蘇木賤如薪色絶勝。余甞赴京。見其國地圖。有龍牙山橫截海中。中闢爲門。形勢甚異。그 사람들은 머리털을 자른다. 面多漆黑。左衽跣足。飮食以手。천조(天朝)의 문자를 알지 못한다. 蓋非冠帶之國也。

일본(日本)의 옛 이름은 왜노(倭奴)이다. 한나라 무제 때, 중국과 통교하기 시작하였다. 당나라 때에 이르러 이름을 일본이라고 고쳤다. 동서가 5천여리, 남북이 수백리이다. 唯東山東海等道。南北千餘里。남북이 좁고 동서가 길므로, 일자국(一字國)이라고 부른다. 《한서》(漢書)에 이르기를, 왜왕은 사마대(邪馬臺)에 기거한다.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에 이르기를, 왜노에는 100여 나라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마(邪馬)이다. 姜沆聞見錄云倭王舊都曰野馬臺。480개의 사찰이 있는데, 그 화려함이 극에 달한다. 蓋與南朝四百八十寺相埒耳。

일본은 한 주(州)가 한 나라인데 무쓰 국〔陸奧州〕이 최대이고, 54개의 군(郡)을 맡는다. 동서로 60일이 걸리는 거리이다. 그 해중(海中)에 금산(金山)이 있다. 北接蝦蛦。그 사람들의 키가 크고 몸에는 털이 있다. 地産文魚貂皮等物。亦有山戎自成聚落。其地廣漠無際。或言自奧州之平和泉。至夷海纔三十里。與我國野人接界。頃歲唐官入鍾城。開諭忽虜時。왜인들은 저 땅에 있다. 聞知其事云。夷海亦曰夷島。所謂蝦蛦。疑卽毛人也。申叔舟海東諸國記曰。其地始於黑龍江之北者是矣。

按日本國圖。八道六十六州。壹岐,對馬二島不與焉。此外又有永良部,平戶島,五島,三島,八丈島等地方。其鄕有九萬二千。其村九十萬九千八百餘。밭이 89만9160정(町)이고, 畠十一萬二千一百四十八町。佛宇二千九百五十八。神宮二萬七千六百十三。男口十九億九萬四千八百零。女二十九億四千八百零。凡城池所在。謂之鄕。55간(間)을 1정(町)으로 한다. 36정을 1리(里)로 한다. 그들의 1리는 우리나라의 10리에 준한다고 한다.

日本天皇。始立於周平王之世。한 성(姓)이 상전(相傳)하여 至今不絶。天皇不預政事。惟享富貴而已。國王號關白。專管國政。以尊事天皇。豈亦周時列國之遺風歟。世謂無所事事者。爲倭皇帝。或曰倭皇姬姓。吳泰伯仲雍之後。或曰以王爲姓。未知信否。

부산에서 동쪽으로 일본의 국도(國都)에 이르는 것은 해로로 거의 사천리이다. 국도에서부터 동북쪽으로 스루가 주 〔駿河州〕에 이르고, 또한 일천리를 (가면) 후지산〔富士山〕이라는 산이 있다. 高四百餘里。屹立海中。山半以上。冰雪嵯峨。盛夏不消。千里內望而見之。그 동쪽은 곧 지명이 미시마〔三島〕이다. 미시마의 동북쪽에는 하코네〔箱根〕라 불리는 준령이 있다. 其上有巨湖。奇花異草森列岸上云。余謂富士山。譯以漢音。則乃不死山。豈山上多生不死藥故耶。宋景濂詩曰六月雪花飄素竁。蟠根壓地三州間是也。三州。倭地名。

後漢書曰。徐福入海。止夷澶洲。韓文所謂海外夷亶之州是也。按夷亶二州名。今倭國南海道。有紀伊州淡州。淡與亶音相近。疑卽夷澶洲也。姜沆聞見錄云倭人謂伊勢之熱田山。紀伊之熊野山。駿河之富士山。爲三神山。又徐福死而爲神。故紀伊州。今有徐福祠。熊野山守神者。徐福之神也。愛宕山守神者。新羅人日羅之神也。日羅者。疑卽三國史所稱迎烏,細烏者也。趙完璧言日本京都。見有徐福祠。徐福之裔主之云。

日本地暖無冰雪。而其北陸道甚寒。每冬雪深數丈。且海島皆石山戴土。故倭人專以土淺深爲饒瘠。만약 흙이 얕아서 한 자이면, 오곡이 익지 않는다. 그 깊이가 일곱 자 이상 한 길에 이르면 가장 두꺼운 것이다. 我國濟州亦如此。土無三尺之厚。故每苦旱災。常貿穀於陸邑。以資其生。葬死者。棺半在地上云。

日本諸倭將。皆有食邑。如家康所食。二百五十萬石。輝元。一百五十萬石。其餘。多或四五十萬石。少或十萬石者。不可悉數。其食一千石者。養兵五十人。一萬石者。養兵五百人。甲兵多少視穀數。其國之富强可想已。 對馬島地皆沙石。居倭專靠我國開市。以爲生理。平時嶺南田稅。太半歸之。세전(世傳)하기를, 소 모리나가〔宗盛長〕는 그 조상이 원래 우리 나라의 송(宋)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다. 入其島爲島主。變姓爲宗。至平秀吉滅之。而以平義智代之。遂嚮導入寇。可勝痛哉。大槪對馬倭。於我國事。無不周知。且解我國言語。變詐百出。雖依平時通貢互市。以羈縻之。異日之爲患必矣。或言義智雖改平姓。而其實宗氏未嘗滅絶云。 日本近江州。有黑土作塊如甓。生田野中。掘則還平。蓋息壤也。倭人用以炊爨。名曰土薪。猶中國之有石炭也。又日本産黑雉而無虎豹鷹鵲。海産魚物。亦不多云。

百濟亡。임정태자(臨政太子)라는 자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들어가서, 爲大內左京大夫。都周防州。號大內殿。自以系出百濟。最親我邦。今倭將輝元之先。乃其從者也。臨政之裔。歷四十七世而絶。輝元之祖。代襲其土。都於安藝州。其俗視他倭寬緩。有我國人氣象云。

바다 동쪽에 모인국(毛人國)이 있다. 其國人遍體生毛幾數寸。服屬於倭。楊生萬世入日本時見之云。《산해경》(山海經)에 의하면, 모국(毛國)은 대해(大海) 중에 거주한다. 韓文曰海外毛人夷亶之州是也。又楊生言女國近於日本。亦有夜叉國。遇人輒啖。일본인들은 그들을 두려워한다. 按事文玉屑等書曰。여국(女國)은 동남해 가운데에 있다. 裸形感風而生。又曰俯視井底水。照見其形。以爲交感。夜叉國在流鬼國北。유귀국(流鬼國)은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동북쪽에 있고, 동남쪽으로는 바다에 닿는다고 한다.

按眞臘國本扶南。地方七千餘里。在占城西南海中。距暹羅半月程。國甚雄富。俗尚華侈。故古有富貴眞臘國之稱。其地四時常如五六月。自四月至九月。每日下雨。自十月至三月。絶無點雨。禽有孔翠鸚哥。獸有犀象野牛山馬。無鴻鵲鶯燕。쥐가 고양이처럼 크다. 正月間荷花開。有茄樹與木綿樹。高可過屋。出風土記。

小說。眞臘國人。不飮酒比之淫。惟與妻飮房中。又西番忽魯謨國。飮酒者棄市。棄市酷矣。而不飮。尤可尚也。

爪哇。古名闍婆其國富饒。땅은 넓고 사람이 빽빽하니, 동양의 여러 번(番)들 중 우두머리이다. 男蓬頭女椎髻。남자는 반드시 허리에 칼을 찬다. 刀極精利。刑無鞭朴。罪不問輕重。刃殺之。尚氣好鬪。顔色黝黑。猱頭赤脚。飮食無匙筯。啖蛇蟻蟲蚓。與犬同寢食。不爲穢也。有水葬火葬犬葬。惟死者所欲。按唐史。南蠻驃國。亦號闍利婆。國最富。王居以金爲甓。屋覆銀瓦蓋是也。

古俚大國。西洋諸番之會。去中國十萬里。王好浮屠。敬象牛。老不傳子。傳外孫。否則傳弟。無外孫弟。傳善行人。俗尚信義。行者讓路。道不拾遺。以葫蘆爲樂器。蓋海中絶國。而有上古三代之風。可尚也。 滿剌加。舊名五嶼。在南海中。氣候朝熱暮寒。王白帛纏頭。俗淳朴。尚回回敎。旁海人畏龜龍。龜龍高四尺四足。身負鱗甲。遇人卽嚙。嚙卽死。山有黑虎。視虎差小。或變人形。白晝群入市。覺者擒殺。按皇明給事中陳嘉猷。嘗奉使其國。有詩集。

방갈랄(榜葛剌)은 동인도(東印度)인데, 나라가 최대이다. 財物豐衍。甲於隣國。王及諸官。皆回回人。祝髮白布纏頭。氣候常熱如夏。陰陽醫卜百工技藝。대략 중국과 비슷하다. 曆有十二月無閏。風俗朴厚。경식(耕殖)하기에 좋아서, 1년에 두번 익는다. 婦女不施脂粉。自然嬌白。飮食。男女不同處。夫死不再嫁。妻死不再娶。만약 과부가 의탁할 곳이 없으면, 한 마을이 돌아가며 그를 보살핀다. 有兜羅錦。闊四五尺。厚可五分。背面皆毳絨。

석란산(錫蘭山)은 대해의 가운데에 있다. 王尚釋重象牛。飮牛乳不食其肉。殺牛者罪死。國富饒。땅은 넓고 사람이 빽빽하다. 亞於爪哇。民上裸下纏帨。有珠池。諸番賈爭來市。有赤印島。사람들이 모두 혈거(穴居)한다. 男女皆裸若野獸。不粒食。食魚蝦芭蕉子波羅蜜。按波羅蜜産南海中。形如東瓜云。

溜山在西海中。四面皆海。無城郭。依山聚居。皆以溜名。無慮三千。舟行遇風失入溜卽溺。土人曰此弱水三千也。人巢居穴處。啖魚蝦無衣。草木葉蔽前後。按韻府曰。“弱水在西海中。不能負羽。蓋是也。” 又晉書。“부여국(扶餘國)은 현도(玄菟) 북쪽에 있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숙신씨(肅愼氏)는 동쪽으로 대해에 임하고, 북으로는 약수에 달한다.” 고 한다. 《속선전》(續仙傳)에 이르기를, “봉래(蓬萊)는 약수와 삼만리 떨어져 있다. 非飛仙莫至。”라 한다. 그러므로, 동북에 또한 약수가 있다는 것이다.

撒馬兒罕。漢罽賓也。去嘉峪關萬里。東西相距千里。風景偉麗。土田膏腴。頗類中原。西南番賈多聚於此。俗尚回回敎。有拜天屋。靑石雕鏤極精巧。인물이 수미(秀美)하고 예능이 많다. 舊有照世杯。光明洞徹。照之可知世事。《오학편(吾學編)》에 따르면, 載其國王表文。중국의 문자와 서로 거의 같다.

天方。舊名天堂。俗用回回曆。風景融和。四時皆如春。田沃稻饒。居民樂業。風俗好善。亦無刑罰。自然淳化。不作盜賊。佛書所謂天堂。疑指此也。

渴石。在撒馬兒罕西南。城周十餘里。사면(四面)이 수전(水田)이다. 故元駙馬居也。山多奇樹。有石峽。兩壁懸崖。宛如斧劈。行二三里。出峽口有門。謂之鐵門關。岑參使交河郡詩曰。鐵關控天崖。萬里何遼哉。卽此也。 土魯番。在火州西百里。古交河縣。亦曰車師國。氣候多煖少雨雪。土宜麻麥。人皆屋居信佛法。有靈山周二十餘里。悉五色砂石。光焰灼火。四回峻壑。天巧奇絶。草木不生。禽獸鮮少。蓋佛書所稱靈山是也。 黑婁。近土魯番。山川草木禽獸皆黑。男女亦然。有鹽澤産石鹽。堅白如石。可琢爲器。以盛酒食。不鹽而鹹。哈烈等地亦産云。

哈烈。去嘉峪關萬三千里。사면(四面)이 큰 산이고 비가 적게 온다. 男髡首。衣尚白。乃喪易靑黑。사람들이 매우 잘 뛰어 하루에 삼백리를 간다. 氣候常煖。男女瀆亂無恥。然有學舍。講習經義。省刑薄斂。寡爭好施。務農桑。蓋其俗亦淳朴矣。

于闐大國。在葱嶺北。東西五千里。南北千里。사람들이 기교(機巧)하다. 喜浮屠法。相見輒跪。得問遺書。戴于首乃發之。稍知尊卑禮節。상모(狀貌)가 또한 화인(華人)을 닮았다. 有白玉河,綠玉河,黑玉河。産玉珊瑚膃肭臍。

火州。漢車師前後王地。장안(長安)(에서부터) 구천리를 간다. 元帝置戊己校尉。屯田於前王庭。以地勢高敞。名高昌。唐太宗平高昌置西州。後陷於吐蕃。元號畏兀兒。今號火州。俗類匈奴。事天神信佛法。按宋史曰。高昌人多壽。率百餘歲。無夭死。其山川。靈山,蒲類海,交河爲大。其地山色如火。天氣多熱。史記相如傳註。崑崙之北。有炎火之山。投物輒然。岑參詩云暮投交河城。火山赤崔嵬是也。

魯陳。一名柳城。在西域中。經大川沙磧無水草。馬牛過此輒死。대풍(大風)이 빠르게 일어나서, 인마(人馬)가 서로 떨어지다. 道傍多骸骨有鬼魅。행인이 짝을 잃다. 白日迷亡。謂之旱海。西有流沙河。北有火焰山。山色如火。氣候和煖。土宜麻麥。有小蒲萄。甘甜無核云。所謂流沙河。蓋卽禹貢流沙也。

忽魯謨斯。在西南海中。土厚宜耕種。人質直。狀貌偉碩。喜作佛事。産獅子駞鷄福鹿靈羊馬哈獸。按韓詩貨通獅子國註。獅子國在南海中。사람의 키가 한 길 다섯 자이고, 배〔船〕는 극히 고대(高大)하다. 梯而上之云。疑卽此也。

亦思把罕。서남해 가운데의 대국(大國)이다. 廣袤千里。王居侈麗。物産豐厚。尚佛畏刑。喜施惡奪。有珠珀而無稻黍。日食惟穄麥。麥粒麤壯甘美。阿速在西海中。亦大國。敬佛鬼好布施。物産饒裕。凉暄適節。人無飢寒。夜無寇盜。蓋樂土也。以上諸國。出吾學編等書。又宋史曰。注輦國。自古不通中國。물길로 광저우〔廣州〕까지 이르니 약 41만여리(里)이다. 此外西番及海外小國。如彭亨,呂宋,阿魯甘,巴里等國。不能悉錄。其不通中華。不入載籍者。亦何限乎。

五代史。西域五盧地無水。而常寒多雪。每天暖雪消。乃得水。又仲雲界無水。掘地得濕沙。人置之胸以止渴。또한《오학편(吾學編)》(에 이르기를,) 西域大沙河可二百里無水。卽有水。사람은 마실 수 없다. 飮牛馬輒死。討來思在海中。산 아래에 물이 있다. 赤色如火燃。亦異矣。

《진서》(晉書)(에 의하면), 숙신씨(肅愼氏), 일명, 읍루(挹婁)는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다. 去扶餘可六十日。동쪽으로는 대해에 접해 있다. 西接寇漫汗國。北極弱水。廣袤數千里。裨離國。在肅愼氏國西北。馬行二百日。養雲國。去裨離馬行又五十日。寇莫汗國。去養雲國又百日。一群國。去莫汗又百五十日。計去肅愼五萬餘里。晉武時各遣小部。獻其方物。按黑水靺鞨。卽肅愼氏也。黑水。今黑龍江也。

五代史曰。契丹東距海有鐵甸。其地少草木。水鹹濁如血。북쪽에 우제돌궐(牛蹄突厥)이 있는데, 사람의 몸과 소의 다리를 (가졌다.) 또한 북쪽에 구국(狗國)이 있는데, 사람의 몸과 개의 머리를 (가졌다.) 털이 길고 옷을 입지 않는다. 語爲犬嗥。남자를 낳으면 개가 되고, 여자(를 낳으면) 사람이 된다. 동북쪽으로 말겁자(襪劫子)[11]에 이르면, 그 사람들은 활을 잘 쏘고, 사람을 만나면 쉽게 죽이고 날로 먹는다. 契丹嘗遣十人。齎乾麨北行一年。經四十三城。많은 주민들이 목피(木皮)로 집을 만든다. 其語言無譯者。不知國土名號。其地遇平地則溫和。山林則寒冽。至三十三城。得一人能鐵甸語云。自此以往。龍蛇猛獸魑魅群行。不可往。此北荒之極也。余謂此北荒外。安知又有世界。如三才圖會所紀者乎。

稗史言回回國。事天事祖之外。無所崇。有詩曰僧言佛子在西空。道說蓬萊在海東。惟有孔門眞實事。眼前無日不春風。余謂回回在西域。而其言如此。以中華之士。而乃尚佛敎何也。回回文字。有篆草楷三樣。其曆法與中國僅差二刻。聞西南諸國。奉回回敎法者多云。蓋斥佛法而以事天爲重耳。又其俗善保養。常護外腎。使不着寒。夜臥以手握之令暖。謂此乃生人性命之本根。不可不保護。此說亦有理。回回或以爲古之大食國。非唐之回鶻,回紇也。내가 북경에 다다랐을 때, 그 나라 사람을 보았다. 皆白布纏頭。亦詭矣。

裸壤國。距日本不遠。그 사람들은 몹시 키가 크다. 全身黑如炭。目多白。額鼻高突。頭髮如羊毛。娶倭女居日本。楊生萬世親見如此云。大抵海中之爲裸壤者多矣。

漢書曰。會稽海外。有東鯷人。分爲三十餘國云。此則似指倭奴而言。今以我國爲鯷岑。恐未是。況可自稱乎。 天下奇寶。多出於西域。如玻瓈瑪瑙葡萄西瓜胡桃獅子之類是也。佛法幻術。皆從西域而出。雖曰左道。可見其人多技藝也。其山川。有流沙,弱水,崑崙,星宿海。中國之黃河源於此。亦靈異矣哉。

佛浪機國。在暹羅西南海中。乃西洋大國也。其火器號佛浪機。今兵家用之。又西洋布極輕細。如蟬翼焉。

남번국(南番國, 네덜란드)인이 만력(萬曆) 계묘(1603년) 년간에 왜나라 배를 따라, 표류하다가 우리나라 경계에 이르렀다. 그 사람들을 보자면, 눈썹과 윗 속눈썹을 통하게 하여 하나로 하였다. 髯似羊鬚。其率人面漆黑。形狀尤醜怪。蓋海鬼類也。言語不通。因倭譯問。則國在海中。距中國八萬里。倭人以地多珍寶。故往來通商。離本土八年。方到此云。蓋絶國也。

영국(영길리국, 永結利國)은 극서(極西)의 바깥 바다(外洋)에 있다. 낮은 곧 극히 길고, 夜纔二更。旋卽天明。其俗惟喫麥屑衣皮裘。以舟爲家。四重造船。以鐵片周裹內外。船上建數十檣竹。船尾設生風之機。碇索用鐵鎖數百湊合以成。故雖遇風濤不敗。전쟁에서 대포를 쓴다. 出沒行劫。海中諸國。감히 상대하는 자가 없다. 頃年。自日本漂到興陽之境。배가 극히 고대(高大)하다. 如層樓大屋。我軍搏戰。不能攻破。致令脫去。後問倭使。知其爲永結利人也。按元史。吉利吉思去中國二萬五千餘里。晝長夜短。卽唐骨利幹國云。結利與吉利骨利音相近。疑卽此也。

按唐史。骨利幹居翰海北。그 땅은 낮이 길고 밤이 짧다. 日沒後天色正曛。煮羊胛適熟。日復出。唐初。號結骨。주자(朱子)가 이르기를, 此是地之角尖處。日入地下。無所遮蔽。故常光明。及東出而爲曉。其所經遮蔽處。亦不多耳。

구라파국(歐羅巴國)은 또한 대서국(大西國)이라고도 한다. 이마두(利瑪竇)라는 자가 있는데, 8년간 바다를 떠다니고, 8만리의 바람과 파도를 넘어, 동월(東粤)[12]에 10여년을 머물렀다. 저술한 바로는, 《천주실의》(天主實義) 두 권이 있다. 첫머리는 천주가 비로소 천지를 지어내고, 안양(安養)의 길을 주재함을 논한다. 다음으로는 인혼(人魂)이 불멸하여 금수(禽獸)와는 크게 다름을 논한다. 次辨輪廻六道之謬。天堂地獄善惡之報。마지막으로 인성이 본래 착하다는 것과 천주(天主)의 뜻을 경봉(敬奉)함을 논하였다. 其俗謂君曰敎化皇。不婚娶故無襲嗣。擇賢而立之。又其俗重友誼。不爲私蓄。著重友論。焦竑曰。西域利君以爲友者第二我。此言奇甚云。事詳見續耳譚。

만력(萬曆) 연간, 계묘년(1609년). 내가 부제학(副提學)이었을 때, 赴京回還使臣李光庭,權憘。以歐羅巴國輿地圖一件六幅送于本館。蓋得於京師者也。見其圖甚精巧。於西域特詳。以至中國地方曁我東八道,日本六十州。地理遠近大小。纖悉無遺。所謂歐羅巴國。在西域最絶遠。去中國八萬里。自古不通中朝。대명(大明)에 이르러 비로소 다시 입공(入貢)하였다. 地圖乃其國使臣馮寶寶所爲。而末端作序文記之。其文字雅馴。與我國之文不異。始信書同文。爲可貴也。按其國人利瑪竇,李應誠者。亦俱有山海輿地全圖。王沂三才圖會等書。頗采用其說。歐羅巴地界。南至地中海。北至冰海。東至大乃河。서쪽으로는 대서양에 이른다. 地中海者。乃是天地之中故名云。

異聞志云天下無處非鬼充塞無間。獨互人國白玉城。以白玉爲之。鬼不敢入。蓋鬼陰物。喜黑而惡白耳。有人至此城得其故。歸以白石繞屋爲墻。時河間多疫癘。獨其家無染者。今人用白堊塗門。亦其遺意也。按後漢書。西域大秦國。以石爲城。列置郵亭。皆堊墍之云。互人。疑亦西域國名。

北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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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周武王時。肅愼氏貢楛矢石弩,按肅愼。卽我國北邊胡也。楛矢。俗所謂西水羅木。胡人用以爲箭者云。五帝本紀註。息愼卽肅愼也。唐虞時。已見於中國矣。

小說曰。突厥居金山之陽。以鐵工役屬單于。突厥者。兜牟也。以善作兜牟故名之。又綱目註。金山狀如兜鍪。其俗號兜鍪爲突厥。因爲國號云。今漢音突厥。與我國方音頭具。亦相近。

昔金完顔氏以本出高麗。遇高麗甚厚。終不侵暴。愛州今義州本高麗地而陷於遼。及金滅遼。以愛州畀高麗。또, 윤관(尹瓘)의 북정(北征) 때, 군병(軍兵) 수백명이 후에 돌아오지 않았는데, 호지(胡地)에 머물러 부락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홀온(忽溫) 추장 하비귀(夏叱貴)는 곧 그의 후예라 한다. 忽溫卽元時火溫衛也。今建州衛。卽女眞遺種。而或言前朝王氏之裔爲奴酋云。未知信否。

《원사》(元史)에서 칭하는 색목인(色目人)이란 대개 몽골 외의 여러 번이(番夷)의 사람을 이른다. 按小說云佛語阿修羅。卽今四夷諸色目是也。 建州,毛憐,海西等衛。皆本女眞而建州最强。永樂時。分置三衛。封其頭目。爲都督指揮。所以渙其群。使不相統攝。誠以夷攻夷之上策也。今奴酋與如許互相雄長。不敢先動。蓋其驗矣。 韻府群玉曰。胡中鹽出於木石。聞今建州夷無鹽。以杻木頭汁。和味以當鹽。所謂出於木石者。蓋此類也。 向化胡人入居內地者。自祖宗朝有之。蓋來者勿拒之意也。頃年以來。奴酋張甚。擄去藩胡。使之後屬。故藩胡多願內附。十百爲群。今畿甸兩湖之間。連村雜處。煙火幾於相望。恐有日後難處之患。謀國者其亦念及於此否。 咸鏡北道。自金宗瑞始設六鎭。垂二百年。以城底居胡爲藩蔽。謂之藩胡。近年以來。建州奴酋張甚。掠去藩胡。殆無遺者。拓地至我境。橫行深入。莫敢誰何。唇亡齒寒之憂。有不可言。


郡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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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黃帝畫野分州。得百里之國萬區。夫中國之地東西南北。不過萬里。安得萬區之多。其謂自中國以達四裔者。亦强說爾。又禹會諸侯於塗山。執玉帛者萬國。按塗山。乃東南一隅地。且諸侯朝聘有時。豈有天下諸國一時盡會之理。其曰萬國。亦言其多也。非實數也。 禹貢註。舜分九州爲十二州。分冀東爲幷。東北爲幽。分靑之東北爲營。營州卽遼東。漢公孫度據遼東。自號靑州刺史。又曰遼東朝鮮等處。皆靑州之境。以其地曠隔。故分爲營州云。按幷州今太原晉代等地是也。三才圖會曰。幽州卽今廣寧以西地。營州卽廣寧以東地也。 成都記。蜀主孟昶。於成都城上。種芙蓉如錦。因名錦官城。余謂此說非是。杜詩花重錦官城註。成都府江山明媚如錦。故呼爲錦官城。則其稱久矣。非始於昶也。余意錦官云者。蓋以蜀中出錦故名之。如銅官鹽官珠官之類。 安市城。按漢書地理志。乃遼東屬縣。又東史曰。安市在遼東之北云。今人妄生穿鑿。欲求之於鴨綠以東則錯矣。金時習遊關西錄。以安州爲安市城。可笑。

우리나라는 지방을 팔도로 나누고, 부목군현(府牧郡縣)을 두었다. 경기좌우도는 4목(牧) 7도호부(都護府) 8군(郡) 18현(縣)이고, 모두 37명의 관리가 있다. 충청도좌우도는 4목 12군 38현이고, 모두 54명의 관리가 있다. 황해도는 2목 4도호부 7군 11현이고, 모두 24명의 관리가 있다. 강원도는 1대도호부(一大都護府) 1목 5도호부 7군 12현이고, 모두 26명의 관리가 있다. 전라도 좌우도는 1목 3목 4도호부 12군 37현이고 모두 57명의 관리가 있다. 경상도 좌우도는 1부 1도호부 3목 8도호부 14군 40현이고 모두 67명의 관리가 있다. 평안도는 1부 1도호부 3목 6도호부 18군 13현이고 모두 42명의 관리가 있다. 함경도 남북도는 1부 1대도호부 1목 12도호부 4군 3현이고 모두 22명의 관리가 있다. 합계 329명의 관리가 있다. 而今革者五。陞府者二。陞大都護府者一。陞都護府者八也。

咸鏡道。本高句麗地。前朝時爲東北面。後咸州以北。沒於女眞。尹瓘擊逐之。後又入于元。凡九十九年而始復之。入我朝爲豐沛之鄕。太祖朝。拓地至豆滿江。世宗朝。設六鎭。其規模布置遠矣。然地近山戎。控禦甚難。非國家威靈。豈得數百年無事乎。

慈城,閭延,茂昌,虞芮等郡。在江界西北。逼近虜巢。世祖朝。議棄其地而空之。其倉穀移置江界者。今尚餘數萬石。陳腐不堪食。中廟朝。野人來居閭延茂昌。발병(發兵)을 명하여 그들을 구축(驅逐)하였다. 又令西帥連年伐穀。俾絶侵占之患。今奴胡鴟張日甚。漸就近境。而恐其生釁。莫敢誰何。豈非可虞之甚乎。

연안(延安) 성중(城中)에는 예전에 물이 없었다. 辛卯年間。趙憲謂倭寇將至而延安爲必守之地。貽書于府使申恪。以北神堂水。鑿地注下于城中。爲守禦之備。恪從其計。翌年壬辰。倭寇圍延安時。以城中有水。故得以固守。至今人皆知申恪之功。而不知出於趙憲之策也。

영평(永平)은 포천(抱川)을 합하여, 하나의 대도호부(大都護府)가 되었다. 迷豚聖求爲判官。築山城於抱州舊址。治地時掘得銅匙鐵鼎。匙則柄長而曲。鼎則體狹而長。與今制大別。自抱州之廢。不知幾千百年。而其色不小變。또한, 동(銅) 인장 한 개를 얻었다. 印文猶可辨識云。異矣。

風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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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記曰。은(殷)나라 사람들은 흰 색을 소중히 여긴다. 詩曰。有客有客。亦白其馬是也。然則東方人好著白衣。豈亦殷太師之遺風歟。 莊子曰。爲天子之諸御。不穿耳。蓋穿耳自古而然。非獨我國之俗也。 雜書。稱婦人有耳璫指環。則我國婦人之爲倣古制耳。唯 부인(婦人)의 쪽머리와 동자(童子)의 변발(辮髮) 出於胡俗。禮法之家。欲遵華制。而舊俗難以猝變。可慨也已。

일통지》(一統志)에 이르기를, 朝鮮風俗。柔謹爲風。按金鶴峰以爲我國人性。謙恭遜順。入則修事親敬兄之道。出則盡忠君死長之義。士大夫崇禮讓厲廉恥。農商工賈。亦守本業。無犯分凌上之習。非但柔謹爲風而已。余謂壬辰之後。倭賊屯據腹內者七年。加以天兵出征。接濟粮餉。負戴供給。力所不堪。而無怨叛之意。天朝將士。無不嘉歎。以曩時言之。鶴峯之言。其信矣。

賓退錄曰。靖州俗。居喪不食酒肉鹽酪。而以魚爲蔬。湖北謂之魚菜。老杜白小詩曰風俗當園蔬是也。 墨莊漫錄曰。番禺海邊。有鬼市。夜半而合。鷄鳴而散。人從之多得異物云。余赴京。見皇城中爲夜市。未明而罷。所謂鬼市。疑亦指夜而言。

舊稱我國婦女貞信不淫。蓋箕子之遺化歟。頃年天兵初出來。劫奸一官娼。娼恥之縊死。以娼而如是。謂之貞信亦宜。然倭賊與天兵。彌漫國內首尾十年之間。婦女爲其所汚。浸以成俗。有不如舊者矣。

중국 여자들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出則必紗掩其面。倚市門者。唯養漢的耳。中華禮俗之美。於此可見。我國男婦混雜無別。雖不能猝變。若爲異路之制則庶矣。

余見中朝婦人有事亦擔肩。而我國則以首戴。故董越賦曰。有頂盂水而手不扶匡者。有戴斛米而步亦趨蹌者。蓋記其異也。

古人以坐爲常。故有侍坐命坐之說。有避席割席之事。管寧之穿榻。亦其證也。 지금 중국인들은 서 있는 것을 예의로 한다. 머무를 때는 반드시 평상(平床)에 걸터 앉는다. 심지어 부자(父子)가 나란히 걸터 앉는다. 未知此俗始於何代。先儒危坐之法。殆廢矣。

江陵風俗淳厚。與諸邑別。每値良辰。請年七十以上。會于勝地以慰之。名曰靑春敬老會。雖僕隷之賤。登七旬者。皆許赴會。自古及今。行之不替云。

春川之麒麟。安邊之永豐。伊川之古未呑。最爲深僻。人跡罕到。比之朱陳村。而亂後催科驛騷。民受其害。風俗亦薄。蘇子瞻題朱陳村圖曰。而今風物那堪畫。縣吏催租夜打門是矣。

我國之俗。凡中外鄕邑坊里。皆作契以相紏檢。謂之香徒。按輿地勝覽。김유신(金廋信)의 나이 열다섯에 화랑(花郞)이 되니 시인(時人)들이 복종하였다. 號龍華香徒云。今香徒之稱。蓋本於此。

安東風俗。最重座首之任。非有德行門望爲一鄕所推服者。則切不許焉。世傳舊有政丞退老後爲座首。近世金鶴峯誠一。以舍人還家。鄕論擧公爲座首。辭病不出。俄有朝命。以執義見召。公喜曰。吾乃今始知宦味矣。

탐라(耽羅)는 절해(絶海) 가운데에 있어 주민들은 바다를 집으로 삼는다. 以漁採爲食。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표류하고 익사하니, 남자가 장례를 치를 수 있는 자는 적다.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으므로, 일부(一夫)가 수십명의 처를 가진다. 雖甚貧窶者。亦不下十婦。其婦常力作。以食其夫焉。

濟州村巷之女。鮮有伉儷。每歲三月。援兵入歸時。女輩凝粧携酒。來待於別刀浦。勸酒相狎。迎至其家。八月罷防。則涕泣追送。林子順作迎郞送郞曲。備記其事

桂海志曰。土人以鸚鵡爲鮓。孔雀爲腊云。乃土産。非怪也。


道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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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明通紀曰。成化十五年。朝鮮爲建州女眞。邀刦使者。請改貢路。兵部郞中劉大夏執不可曰。朝鮮貢道。自鴉鶻關。由遼陽廣寧。過前屯入山海。迂回四三大鎭。此祖宗微意。若自鴨綠江。抵前屯山海太徑。恐貽他日憂。遂不從其請云。以此觀之。常言自鴨綠至山海關。有徑路者信矣。 麗史。太宗親征至遼東。遼澤泥潦。車馬不通。命軍剪草塡道。以車爲梁云。余見沙嶺高平盤山等地。廣野無際。큰 비가 오니, 곧 긴 담장 수백리를 지어, 以通人馬。疑卽遼澤也。

赴京道路。自王京至義州一千一百八十六里。自義州至皇都二千十二里。鴨綠江抵遼東中間。曰東八站伯顔洞。俗傳元將伯顔駐兵之地。鳳凰城,金石山,八渡河。皆所經也。요동은 큰 도회(都會)가 되었다. 華表柱,廣祐寺,白塔,望京樓在焉。白塔世傳尉遲敬德所築。海州衛。乃管寧舊居。安市城在遼東云。而今不詳其處。鞍山卽唐太宗駐蹕臺。三叉河卽遼水。三國時爲高句麗之界。其西則古遼西郡。醫巫閭卽幽州鎭山。廣寧蓋亦幽州之域也。山上有聖水盆。參議賀欽故址在焉。山海關爲遼薊咽喉。望海亭枕其角。形勢甚壯。永平府。漢右北平地。卽李將軍射虎處。灤河二水。作燕尾形。河上有孤竹城。城中有夷齊廟。玉田古無終地。陽雍伯種玉之處。薊州古漁陽。城外有祿山橋。城中有獨樂寺。절에 큰 금불(金佛)이 있다. 崆峒山。軒皇問道之所。薊門煙樹。爲燕臺八景之一。皇城內有柴市。乃文丞相死處。今國子監所經過賣薪處是也。皇城東路左。有三忠祠。三忠謂諸葛武侯,岳武穆,文丞相也。黃金臺在皇城。迤西三十里云。

華表柱。按三才圖會。在遼陽城東六十里。然則今遼城中指爲華表柱者。蓋誑之也。古詩類苑註。遼東諸丁譜。載令威漢初學道得仙云。今鎭東堡在遼陽迤東。居民多姓丁。豈卽其地歟。 在昔赴京使臣。自我國咸從豐川靈光開洋。至登萊州。或浙江下陸。故三邑之有妓樂。蓋爲迎餞使臣而設。豐川今移屬于安岳云。天使祈順詩曰。海州鄰甕津。宋使甞經此。東牟逢麗人。舟檝能指示。來從芝崗島。風便兩日耳。芝崗島。今不知所在。言兩日則其近可知。蓋宋以前。中國商船。絡繹往來。至大明。以倭患故。海禁甚嚴。不通者餘二百年矣。

芝峯類說卷二終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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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마천, 《사기》, 〈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진시황 28년 (기원전 219년) 조(條), “바다에 봉래(蓬山), 방장(方丈), 영주(瀛洲)라는 삼신산에 신선이 살고 있습니다.” 참조.
  2. 명나라 사람 정효(鄭曉)의 1599년 저작이다.
  3. 한서》(漢書), 〈권95〉 “朝鮮王滿,燕人。... ” 단락 참조. 지봉유설의 원문에는 “又衛滿亡命渡浿水。”라 하였는데, 한서에는 이와 똑같은 대목은 없고, “滿亡命[...] 渡浿水”라고 하였다.
  4. 사기/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 참조.
  5. 후한서》,〈권85 동이열전〉 “한(韓)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첫째 마한(馬韓)·둘째 진한(辰韓) 셋째 변진(弁辰)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고, 54국(國)이 있다. 북쪽으로는 낙랑(樂浪)과, 남쪽으로는 왜(倭)와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고, 12개국(國)이 있다. 북쪽으로는 예맥(濊貊)과 접한다. 변진은 진한(辰韓)의 남쪽이며 역시 2개국(國)이 있다. 남쪽으로는 역시 왜(倭)와 접한다. 무릇 78국인데,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이다.”
  6. 1406년 영락제는 베트남을 침공하여, 1407년에 일개 성(省)으로 편입하였다.
  7. 가정(嘉靖)은 명나라 가정제의 연호(元号) 이다.
  8. 명나라 때, 양종(楊淙)이 편찬한 책이다.
  9. 교지에 속한 현(縣) 이름이다.
  10. 원문은 ‘郍’이다. ‘邪’의 오기로 보인다.
  11. 몽골을 뜻한다.
  12. 광동성의 동부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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