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하(繒賀, ? ~ 기원전 168년)는 초한전쟁기 전한의 군인이다.
한왕 3년(기원전 204년) 집순(執盾)으로서 진양(晉陽)에서 처음으로 고제를 따랐고, 이후 연오(連敖)가 되어 항우를 쳤다. 한왕이 패주할 때 말을 타고 돌진하여 서초의 군세를 저지하였고, 고제는 증하를 기왕(祁王)이라고 불렀다.[1]
이후 팽성에서 싸우고 항우를 베었으며, 험지에서 힘써 싸운 공로로 기후(祁侯)에 봉해지고 식읍 1,400호를 받았다.
문제 12년(기원전 168년)에 죽어 시호를 곡(穀)이라 하였고, 아들 증호가 작위를 이었다.
- ↑ 무슨 의미로 '기왕'이라고 부른 것인지 알 수 없다. 안사고는 유방이 증하를 고맙게 여겨, 기나라 왕에 봉해주겠다는 뜻으로 부른 것으로 추측하였다.
선대 (첫 봉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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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의 기후 기원전 201년 6월 정해일 ~ 기원전 1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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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 아들 기경후 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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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0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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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20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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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30위 |
- 괴성존후 주설(21 또는 22)[1]
- 도창장후 주진(23)
- 염차후(24) 원경(元頃)|원류(爰類)
- 성경후 동설(25)
- 유구제후 융사(26)
- 고성장후 윤회(26)
- 아릉경후 곽정(27)
- 광엄장후 소구(28)
- 하양장후 진연(29)
- 요이후 공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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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40위 |
- 비어후 진하(31)
- 평도후(32) 패가(沛嘉)|공사희(工師喜)
- 무강장후 장불식(33)
- 여려[2]애후 주조(34)
- 대정후 대야(35)
- 세제후 여박(36)
- 해양제신후 요무여(37)
- 척구의후 당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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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50위 |
- 동무정후 곽몽(41)
- 고원제후 병천(41)
- 악성절후 정례(42)
- 선곡제후 정의(43)
- 위기장후 주정(44)
- 창무정신후 선녕(45)
- 강양제후 화무해(46)
- 곡역헌후 진평(47)
- 동모경후 유조(48)
- 균장후 장평(48)
- 복양강후 진서(49)
- 의씨경후 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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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 60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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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 70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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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 80위 |
- 청간후 질중동
- 강간후 유승(留勝)|강어후 유힐(留肹)
- 영릉이후 여신
- 축아효후 고읍(高邑)|고색(高色)
- 자조단후 적|극주
- 오제후 양성연
- 당양애후 손적
- 영장후 위선(魏選)|위속(魏遬)
- 장절후 모택
- 기신광후 진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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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 90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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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 100위 |
- 순경후 온개
- 역간후[5] 정흑(92)
- 고릉어후 왕주(92)
- 무원정후 위거
- 오방장후 양무
- 번장후|평엄후 강첨(彊瞻)|장첨사(張瞻師)
- 분양(장)후 근강(96)
- 심택제후 조장야(趙將夜)|조장석(趙將夕)(98)
- 송자혜후 허치
- 알지절후 풍해감(馮解敢)|풍해산(馮解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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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 110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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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 120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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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 130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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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 137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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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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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호가 없을 때에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순서가 내려간다. 이름이나 시호, 봉작의 표기가 《사기》와 《한서》가 다를 때에는 (《사기》의 표기)|(《한서》의 표기)로 쓴다. 이탤릭체는 고조 사후 봉해졌으나 위계가 기록된 경우다.
- ↑ 《사기》에서는 21위, 《한서》에서는 22위라 한다.
- ↑ 상제를 피휘해 융려라고도 한다.
- ↑ 《사기》에는 순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 ↑ 《사기》에서는 '양하제애후'에 이름은 기록이 없고, 《한서》에서는 '양하제후 기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 ↑ 《사기》에서는 봉읍을 마(磨)라 했으나, 《사기색은》에서는 이를 오류라고 했다.
- ↑ 《사기》에서는 116위, 《한서》에서는 126위라고 한다. 《사기》를 따를 경우, 척새와 순위가 중복된다.
- ↑ 원래는 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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