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콜린스(매니저)

Tim Collins (manager)

팀 콜린스는 1984-1996년 미국 하드 록 밴드 에어로스미스의 매니저로 가장 유명한 사업가, 매니저, 멘토다.

개인사

1980년대가 "역대 록에서 가장 극적인 컴백 중 하나"[1]인 에어로스미스의 복귀를 기념했던 것처럼, 그들은 또한 이 밴드의 개인 매니저인 팀 콜린스의 유명세를 이끌었다.

콜린스는 14살에 Tax Free라는 밴드에 가입했다.[2] 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하면서 콜린스는 밴드의 공연 예약과 재정 처리도 책임졌다. 밴드에서 연주하고 학교에 가는 동안 콜린스는 앤더슨 리틀에서 의류 판매원으로 풀타임으로 일했고 그가 번 돈을 밴드에 사운드 시스템과 트럭을 사주는 데 사용했다. 1970년 면세점이 콜린스를 대체하자 그들은 콜린스에게 "기타보다 더 훌륭한 매니저가 된다"고 말하며 콜린스에게 관리해줄지 물었다.[3] "택스 프리" 이전에 팀은 "밸리 결정"이라는 밴드를 결성했는데, 팀 온 기타, 존 보이머스 키보드, 케빈 웜슬리 드럼, 빌 월시 베이스 기타였다. 그 밴드의 모든 멤버들이 세인트루이스에 참석했다. 매사추세츠 월섬에 있는 메리 고등학교. 월트 휘트먼 시의 이름을 따서 ""VD"는 매사추세츠 월텀에서 열린 밴드 전투에도 출전했다. 최소한 그들이 꼴찌는 아니었다!

이쯤 되자 콜린스는 매사추세츠주 월텀에 있는 벤틀리 대학을 졸업하고 조직 행동과 마케팅을 전공했다.

그가 계속해서 Tax Free를 운영하면서 콜린스는 지역 대학과 나이트 클럽을 모두 플레이한 보스턴 지역의 지역 인재를 예약한 밴드 언리미티드 프로덕션을 오픈했다. 1977년, 그는 새로운 날을 가진 젊은 록 밴드인 [4]바보들과 계약했다. 그들은 매우 빠르게 지역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들을 발전시키기 위한 영향력을 얻기 위해, 그는 1978년 캐슬 뮤직 프로덕션에서 일하기 위해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바보들을 데려왔다.

콜린스는 조나단 에드워즈, 마틴 멀, 고아, 듀크 앤 더 드라이버 등 당대의 위대한 포크록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한 것으로 알려진 예술가 매니저 피터 캐스퍼슨에서 일했다.[5] 캐슬 뮤직에서 일하는 동안, 그 회사는 바보들을 EMI 레코드에 서명시키는 데 성공했다.

더 바보[4]캐슬뮤직에서 더 큰 조직의 지원으로 히트곡 "사이코 치킨"과 "아름다운 소녀들을 위한 밤"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1979년, The Talking Heads의 "Pycho Chicken"을 패러디한 "Pyco Chicken"이 보스턴 공중파 상공에서 폭발했다. 밴드는 너무 흥분해서 거의 즉시 "It's a Night for a Beautiful Girls"라는 또 다른 히트곡을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EMI 레코드는 밴드와 계약을 맺고 The Kick과 함께 미국 투어를 위해 그들을 보냈다. "이번 투어는 굉장한 성공이었습니다." 투어가 끝난 후, 밴드는 그들의 데뷔 앨범 "Sell Out"을 녹음하기 위해 마이애미로 향했다.[4]

콜린스는 또한 "햇볕"이라는 히트곡으로 잘 알려진 조나단 에드워즈를 만났다.

콜린스는 1979년 4월 1일 캐슬뮤직을 떠나 콜린스/바라소 에이전시를 시작했다. 그의 새로운 파트너인 스티브 바라소는 지역 보스톤의 음악가였는데, 그는 Camility Jayne이라는 밴드에서 음악 활동을 하다가 폐 질환으로 인해 활동을 중단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두 사람은 만났고 스티브는 팀을 설득하여 캐슬을 떠나 그들만의 사업을 시작하게 했다. 콜린스/바라소 기관은 캘리포니아 올스톤에 본부를 설립했다.

콜린스/바라소 에이전시는 뉴잉글랜드에 본사를 둔 지역 음반 아티스트들을 위한 장소가 되었다. 명단에 오른 많은 재능 있는 음악가들 중에는 조나단 에드워즈, 아즈텍 투스텝,[6] 제임스 몽고메리 블루스 밴드,[7] 듀크와 드라이버즈,[8] 올리언스 [9]등이 있었다. 그들은 또한 뉴잉글랜드 전역의 대학 쇼와 더 큰 공연장을 위해 주요 기획사로부터 인재를 배출하고 조달했다.

에어로스미스와 함께한 역사

1980년대 초 팀 콜린스는 1979년 에어로스미스를 떠난 기타리스트 조 페리가 만든 솔로 프로젝트인 'The Joe Perry Project'의 매니저로 일했다. 1984년 콜린스는 원조 에어로스미스의 개혁을 주창했다. 그는 1984년 4월 기타리스트 조 페리와 브래드 휘트포드가 밴드에 다시 합류하면서 성공했다. 그는 자신이 1990년까지 에어로스미스를 세계에서 가장 큰 밴드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만약 그가 원래의 밴드를 개혁하고 밴드 멤버들에 대한 개입을 조정하는데 도움을 준다면, 그들은 깔끔하고 냉정해질 것이다. 에어로스미스는 1984년 5월 공식적으로 개혁하고 콜린스를 그들의 매니저로 고용했다. 1984년 여름, 모든 주요 음반사가 에어로스미스에 음반 계약을 체결한 후, 유명한 음악 변호사 브라이언 로한의 도움으로 콜린스는 전설적인 A&R맨 존 칼로드너에게 에어로스미스를 게펜 레코드에 계약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이 밴드는 널리 순회공연을 했고 1985년 Done with Mirrors라는 제목의 클래식 라인업이 재결합한 후 첫 앨범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앨범은 그들이 기대했던 성공이 아니었고, 이 밴드는 주류 대중화를 받지 못했고, 이 밴드 멤버들의 마약 중독과 그들 스스로 마약을 끊으려는 시도는 효과가 없었다. 콜린스와 그의 팀은 뉴욕시의 루이스 콕스 박사의 도움으로 리드 싱어 스티븐 타일러에 대한 마약과 알코올 개입을 조직했다. 타일러는 펜실베니아 카론 재단의 마약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이 프로그램은 그에게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 직후 나머지 밴드 멤버들도 그 뒤를 따랐다.

콜린스가 에어로스미스에 동의한 주요 내용 중 하나는 에어로스미스의 노래 "Walk This Way"의 런DMC 커버에 타일러와 페리가 등장하는 것이었다. 이 콜라보레이션과 후속 영상은 에어로스미스를 다시 한 번 가명으로 만들었고, 밴드를 새로운 세대에 개방했다.

1987년 그들의 다음 앨범인 Permanent Bacy가 발매될 때쯤에는 밴드 멤버들 모두가 깨끗해졌고, 콜린스는 이제 그의 이름인 "Collins Management"를 통해 밴드가 다시 명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이쯤 되자 칼로드너와 콜린스는 승리 조합인 창조적인 파트너십을 맺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앨범을 녹음하는데 있어서 밴드와 함께 일하기 위해 외부의 일류 작곡가들과 프로듀서들의 도움을 요청했고, 밴드가 전설적인 건스 앤 로지스를 포함한 밴드를 위해 개업할 유망한 활동들로 세계를 널리 여행하게 했고, 그는 일류 뮤직비디오 감독들의 도움을 요청했고, 지금은 밴드를 가지고 있었다. 텔레비전, 영화, 비디오 게임, 주요 축제 등에 수많은 출연을 하여, 그들의 오래된 팬층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세대의 팬들을 이기는데 도움을 준다.

1987년과 1994년 사이에 에어로스미스는 3장의 앨범과 컴파일 앨범(영구적 휴가, 펌프, 겟 그립, 빅 원스)을 발매하여 미국에서만 총 2,300만장이 판매되어 밴드 3개의 그래미상과 수많은 비디오 뮤직 어워드를 수상하였다.

1994년 말에 18개월간의 Get a Graph Tour가 끝났을 때, 이 밴드는 그들의 다음 앨범인 컬럼비아 레코드를 위한 Nine Lives를 녹음하는 데 많은 휴식을 취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컬럼비아 음반은 휴가를 원하는 콜린스와 밴드를 압박했다. 콜린스와 그의 팀은 컬럼비아 레코드에 대한 그들의 계약 의무를 이행하는 더 빠른 수단을 얻을 수 있도록 더 많은 구조를 만들었다. 이것은 그 밴드에서 좋지 않은 반응을 얻었다. 에어로스미스를 위한 녹음은 역사적으로 길고 힘든 과정이었고, 이것은 종종 밴드 멤버들 사이의 논쟁을 야기시켰다. 이 밴드는 광범위한 휴가를 얻었고 타일러와 페리는 1990년대 중반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열린 세션에서 프로듀서/송라이터 글렌 발라드와 함께 작곡, 녹음, 리허설 작업을 하고 있었다. 컬럼비아의 몇몇 임원들은 타일러와 페리가 필링곡에서 발라드와 독립적으로 작업하고 있었고 밴드 전체가 한 번에 몇 달씩 함께 작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5000만 달러를 투자한 밴드가 해체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Tyler와 Perry는 함께 곡을 작곡한 후 녹음 시간에 밴드로 하여금 곡을 녹음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드러머 조이 크레이머는 건강상의 문제로 사전 제작 중에 제외되었다. 컬럼비아는 그들이 음반 계약을 맺은 콜린스가 밴드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있는 것이 두려웠다. 이러한 과도한 압박은 콜린스와 에어로스미스 사이에 문제를 일으켰다.

에어로스미스의 멤버들은 콜린스와 존 칼로드너가 밴드가 부활하고 주류 인기와 수용으로 다시 도약하는 데 도움을 준 것에 감사하면서도 1996년 7월 콜린스를 해고했다.

에어로스미스 이후의 삶

팀 콜린스는 음악, 회복, 비즈니스 커뮤니티에서 많은 역량을 발휘했다.

그의 활동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버클리 음대 이사회 회원
  • 이사회 카론 재단(알코올 회수 치료 센터)
  • 국립 녹음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일부인 음악가 지원 프로그램 이사회(MAP, 현재 이름: MusiCares)의 회원이다.
  • 팀은 콜린스 매니지먼트라는 이름을 통해 "턴어라운드" 컨설턴트로 잘 알려져 있으며, 전 세계 예술가, 기업, 비영리 단체들의 높은 수요를 받고 있다.
  • 많은 대학에서 강사와 초청 연사를 자주 한다.
  • 그는 애리조나에 거주하며, 12단계 회복 프로그램의 설계와 시행, 학생들의 멘토링, 환경 활동, 개 훈련(장애와 구조를 위한 개 훈련), 글쓰기, 사진 촬영에 매우 적극적이다.

2009년에 팀 콜린스는 A&E 네트워크에 나중에 등장한 전기 채널에서 인터뷰를 했다. 보스턴 글로브의 한 기사는 콜린스의 일렉트릭스 에어로스미스 특집 인터뷰가 13년 전 해고된 이후 첫 인터뷰였기 때문에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언급했다.[10]

콜린스는 보스턴 헤럴드에 "이런 인터뷰를 한 적은 없지만 시간이 모든 상처를 치유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스티븐(타이틀러)이 참가하지 않을 것이며 많은 사람들을 깔아뭉갰다고 말했다. 나는 단지 그들이 미국 최고의 락밴드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 기록을 바로 세우고 싶었다. 원래 30분만 하기로 했는데 4.5시간 동안 계속 테이프에 녹음하게 놔뒀어." 콜린스는 자신이 록닥에 참여하게 되면서 에어로스미스 기타리스트인 조 페리와 브래드 휘트포드가 콜린스의 생생한 영상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콜린스는 헤럴드로부터 밴드를 운영하기 위해 다시 돌아올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직접 받았다.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소.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었다."라고 콜린스가 말했다. "인생은 넘어간다."

2009년 여름, 완전히 우연의 일치로, 콜린스와 타일러는 말 그대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덴버의 리츠 칼튼 호텔 로비에서 서로 부딪혔는데, 그곳에서는 지나간 날을 연상시키는 깊은 감정의 교류가 있었다. 콜린스는 이번 사건에 대해 "상황이 완전히 돌아오고, (다시 한 번) 예전 삶에서 그렇게 중요한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은 항상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참조

  1. ^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의 로버트 힐번
  2. ^ 나중에 대역 이름을 Connection으로 변경
  3. ^ 월섬 뉴스 트리뷴 이제 데일리 뉴스 트리뷴
  4. ^ a b c 바보들 공식 웹사이트
  5. ^ 듀크 앤 더 드라이버 공식 웹사이트
  6. ^ 아즈텍 2단계 공식 웹사이트
  7. ^ 제임스 몽고메리
  8. ^ Facebook의 경우: 듀크 앤 더 드라이버
  9. ^ 공식 사이트 올리언스
  10. ^ Joan Anderman, Bio: 똑같은노래와 춤. 2009년 6월 4일 보스턴 글로브 2016-10-01 검색됨

추가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