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야오 (군주)
Liu Yao (warlord)유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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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繇 | |
양주지사(揚州都事) | |
재직중 195 –198 | |
모나크 | 한 선제 |
무술의 힘을 북돋아 주는 장군 (振武將軍) | |
재직중 195 –198 | |
모나크 | 한 선제 |
양성감리사(州城監理使) | |
재직중 194 –195 | |
모나크 | 한 선제 |
개인내역 | |
태어난 | 157[1][a] 산둥성 옌타이시 무핑 구 |
죽은 | 198 (41)[1][2] 장시성 난창시 |
관계 | 류다이(형) |
아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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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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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정치가, 군벌 |
예의명 | 정리 (正li) |
류야오(157~198), 예명 정리는 중국 동한 말기에 살았던 정치인이자 군벌이었다.[1] 한나라 건국 황제 류방(가오황제)의 장남 류페이(劉 liu)의 후손이었다. 18세 때 도적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친척을 구해 유명해졌다. 그는 샤올리언으로 지명된 후 한문관 생활을 시작했으며 청렴결백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1944년 한제국 황실에서 양성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군벌 원수가 양성 화이강 일대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기 때문에 간신히 관할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195년에는 우방인 쑨세를 보내 류요를 공격하게 한 류요와 위안슈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손세는 류요를 물리치고 지금의 장시 성으로 남쪽으로 후퇴하도록 강요했는데, 류요는 군벌 제룽을 물리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그의 형은 또 다른 저명한 군벌인 류다이였다.
가족 배경
류요는 산둥 성 옌타이 현 무핑 구에 있는 동라이 특공대(東lai郡) 무핑 현 출신이다. 그는 귀족 출신이었다. 무핑의 마르키스(牟ping)라는 칭호를 갖고 있던 그의 조상 류시에(劉 x)는 류장뤼(劉江ü)의 아들이다. 류장뤼는 한나라의 시조 류방(가오황제)의 장남 류페이(劉 liu)의 아들이다.[4]
류요의 할아버지 류벤(劉 ben本)은 저명한 유학자였다. 류요의 아버지 류유(劉 yu)는 산양 특공대 행정관(山陽軍事官)을 지냈다.[5] 류요의 숙부 류총(劉 chong)은 한제국 황실에서 대군(大軍)을 지냈다.[6]
류요오(劉 liu)의 형인 류다이(劉大)는 궁중 수행자(中中)로, 후에 연성(延城)의 감찰자(刺刺者)로 있었다.[7]
어린 시절과 경력
류요가 18세 때 친척인 류웨이(劉韙)가 도적패에게 인질로 잡혔다. 류요는 가까스로 류웨이를 구출해 무사히 데려왔다. 그는 용감한 행동으로 유명해졌다.[8]
얼마 지나지 않아 류요는 샤오리안(孝孝;민원 후보)으로 지명되어 한문당에 입성하게 되었다. 이어서 신사(神社, 神社, 神社, 안후이 현 당산 현)에 임명되었다. 그는 나중에 특무대에서 영향력 있는 엘리트들을 도와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거부한 후 사임했다.[9]
류요는 이후 진안주(秦安州)에서 관리로 복역한 것으로 소환되었다. 진안총리는 중앙정부의 실세 관료의 아들이었다. 류요는 그가 부패한 관행에 관여하는 것을 들키자 황실에 위문을 써서 불평을 늘어놓았고, 그 결과 수상은 해임되었다.[10]
핑위안(平安) 특공대(平陶) 출신의 관료인 타오추홍(太 tao洪)은 뛰어난 활약을 위해 청도 감사관에게 류요(劉oc)를 마오카이(馬茂)로 지명할 것을 제안했다. 경감은 이미 작년에 공산(류다이)을 지명했다. 올해는 왜 정리(류야오)를 지명해야 하는가?" 타오추홍은 "공산을 먼저 지명하고, 그 다음에 정리를 지명하면 사람들이 '두 마리의 용을 긴 여정에 태워다 준다' '두 마리의 훌륭한 기종을 자유롭게 달리게 해 준다'는 말을 그대로 하고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왜 이러면 안 돼?" 그 후 류요는 작업부 장관(司空)과 제국 검열관(侍侍官)의 보좌관(掾掾官)[11]을 맡겠다는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양 성 지사
류요는 180~190년대 중국 중북부에 혼란이 일어나자 화이난 지방(현재의 중부 안후이)으로 남쪽으로 도망쳤다. 1944년 황실은 그를 양성의 감찰관( (刺官)으로 임명하였다.[12] 그 무렵 군벌인 위안슈는 화이난 지역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했다. 류요는 원슈를 두려워했고, 그의 관할의 상당 부분이 원슈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그의 임명을 상정할 수 없었다. 그는 남쪽으로 더 나아가 양쯔강을 건너 퀘이 현(曲阿縣;현재의 장쑤성 단양)에서 우징과 쑨벤을 만났다. 그들은 그가 취 현에 양 성 지사 거점을 세우는 것을 도왔다.[13]
195년 한나라 왕위를 찬탈하고 스스로 황제를 선포할 뜻이 있었던 원수는 자신의 군대로 하여금 인근 사령관과 군을 정복하도록 명령했다. 류요는 부하 판응(樊 to)과 장잉(張英)을 강둑 근처의 역군으로 보내 원수의 진격을 경계했다. 이전에 우징과 손벤이 원슈 밑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으므로 류요는 이들을 불신하고 강제로 떠나게 했다. 원수는 자신을 양성의 감찰관으로 임명하고, 우징, 순벤과 연합하여 류요를 공격했다. 판응과 장잉은 며칠 동안 적의 공격에 대항하여 간신히 진지를 유지했다.[14]
195년 한제국 황실에서는 류요를 양성 주지사( governor城府使)로 승진시키고, 동시에 그를 '무력(武力)을 고무하는 장군'(武力)으로 임명하였다. 류요는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수천 명의 병력을 간신히 집결시켰다. 같은 해 군벌 쑨세(위안슈와 연합)가 군대를 이끌고 양쯔강을 건너 판응과 장잉을 무찔렀다. 류야오는 단투 현(丹徒縣; 현재 장쑤 성 첸장 시 단투 구)으로 남쪽으로 도망쳤다.[15]
유장 전투와 죽음
단투 현에서 류요는 콰이지 특공대(會會郡; 현제 저장 시 샤오싱 시)로 피신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쉬샤오는 대신 유장 특공대에 가라고 권했다. 그는 콰이지 특공대가 자원이 풍부해 곧 손세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유장군사는 북쪽으로는 유성, 서쪽으로는 징성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으므로 조조, 류비오 등 다른 군벌들과 동맹을 맺어 원수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 더 편할 것이다. 류요는 쉬샤오의 제안에 귀를 기울이며 유장 특공대를 찾았다.[16]
류요와 그의 군대는 펑제 현(彭ze縣, 현재의 장시 후커우 현 동쪽)에 이르러 그 곳에 수비했다. 당시 저우슈(周 shu) 전 유장군사령관은 병으로 사망해 집무실이 비어 있었다. 류비오(劉 b) 진( jing)은 제갈현( zhugeuan)을 지지하여 새 행정관을 맡겼으나, 한제국 황제가 주하오(周o)를 임명하여 저우슈(周 shu)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류요는 부하 제룽을 보내 제갈환을 공격하고 주하오를 돕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갔다. 쉬샤오보는 류야오에게 "제룽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보든 상관하지 않는다. 주원밍(주하오)은 사람을 너무 신뢰한다. 그에게 (제룽을) 경계하라고 경고해야 한다." 제갈순을 몰아낸 후, 쉬샤오 예감대로 제룽은 주하오를 죽이고 유장 특공대를 장악했다.[17][18]
류요는 제룽을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나섰으나 후퇴했다. 이어 주변 군에서 병력을 더 모집하기 시작했고, 결국 제룽을 무찔렀는데, 제룽은 야산으로 도망쳐 샤뉴족에게 살해당했다. 류요는 198년[1] 42세의 나이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동아시아 나이 계산에 의해).[2]
사후 사건
199년 쑨세가 장하 특공대를 공격하러 가던 중 유장 특공대를 지나 류요의 유해를 수습하고, 류요의 적절한 제사를 주선하고, 류요의 가족을 친절하게 대했다.[19]
왕랑은 쑨세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과 원슈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기 전에 류요와 쑨세의 가족이 어떻게 잘 지내왔는지를 설명했다. – 그 갈등은 류요와 쑨세를 그 당시 원슈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류요와 쑨세가 서로 대립하게 만들었다. 그는 쑨세에게 류요가 원해서 죽었지만, 유장 특공대에 정착한 후 쑨세와의 우호 관계를 다시 맺을 기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또 류야오에게 적절한 장례식을 주선하는 선세의 친절한 몸짓을 칭찬하고, 선세에게 류야오 장자를 잘 대하라고 충고했다.[20]
후손
류요의 장남 류지(劉基基)는 삼국시대에 순세의 동생이자 동우국의 건국 황제인 손취안(孫 qu)의 밑에서 섬기러 왔다. 쑨취안은 류지를 매우 존경하고 귀여워했다. 쑨취안은 황제가 된 후 류지를 문과에 임명하였다(文光勳). 손견의 아들 중 한 명인 순바(孫孫)가 류지의 딸과 결혼했다.[21]
류야오에게는 또 다른 두 아들이 있었는데, 류쇼오(劉 sh)와 류상(劉上)은 둘 다 손취안(孫 under) 밑에서 기병 특공대(騎公臺)를 지냈다.[22]
삼국지연의
류요는 14세기 역사소설 《삼국지연의 로맨스》의 단역으로, 동한 말기와 삼국시대의 사건을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5장에 등장하여 장동 지역의 무능한 군벌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또 다른 장동 군벌인 왕랑과 옌바이후와 동맹을 맺고, 군벌 쑨세의 침략에 대항한다. 류요(劉 under) 휘하의 무사인 타이시씨(太時氏)는 그를 공손히 대하고 간신히 그를 설득하여 탈주하게 한 쑨세(孫世)에게 붙잡혔다. 손세는 결국 전투에서 류요를 격파하고 영토를 빼앗은 뒤 유장 특공대로 피신하도록 강요했다.
참고 항목
메모들
- ^ 상구오즈에서의 류요의 전기는 그가 198년에 42세(동아시아 나이 계산에 의한)[2]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언급하였다.[3] 계산해 보면 그의 생년월도는 157년 전후가 되어야 한다.
참조
- ^ a b c d 드 크레스피니(2007), 페이지 574.
- ^ a b c (繇進討融,為融所破,更復招合屬縣,攻破融。融敗走入山,為民所殺,繇尋病卒,時年四十二。) Sanguozhi vol. 49.
- ^ (會劉繇卒於豫章, ...) Zizhi Tongjian vol. 62.
- ^ (劉繇字正禮,東萊牟平人也。齊孝王少子封牟平侯,子孫家焉。) Sanguozhi vol. 49.
- ^ (續漢書曰:繇祖父本,師受經傳,博學羣書,號為通儒。舉賢良方正,為般長,卒官。 ... 續漢書曰:繇父輿,一名方,山陽太守。岱、繇皆有雋才。) Xu Han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9.
- ^ (繇伯父寵,為漢太尉。) Sanguozhi vol. 49.
- ^ (繇兄岱,字公山,歷位侍中,兖州刺吏。) Sanguozhi vol. 49.
- ^ (繇十九,從父韙為賊所劫質,繇篡取以歸,由是顯名。) Sanguozhi vol. 49.
- ^ (舉孝廉,為郎中,除下邑長。時郡守以貴戚託之,遂棄官去。) Sanguozhi vol. 49.
- ^ (州辟部濟南,濟南相中常侍子,貪穢不循,繇奏免之。) Sanguozhi vol. 49.
- ^ (平原陶丘洪薦繇,欲令舉茂才。刺史曰:「前年舉公山,柰何復舉正禮乎?」洪曰:「若明使君用公山於前,擢正禮於後,所謂御二龍於長塗,騁騏驥於千里,不亦可乎!」會辟司空掾,除侍御史,不就。) Sanguozhi vol. 49.
- ^ (侍御史劉繇,岱之弟也,素有盛名,詔書用為揚州刺史; ...) Zizhi Tongjian vol. 61.
- ^ (避亂淮浦,詔書以為揚州刺史。時袁術在淮南,繇畏憚,不敢之州。欲南渡江,吳景、孫賁迎置曲阿。) Sanguozhi vol. 49.
- ^ (術圖為僭逆,攻沒諸郡縣。繇遣樊能、張英屯江邊以拒之。以景、賁術所授用,乃迫逐使去。於是術乃自置揚州刺史,與景、賁并力攻英、能等,歲餘不下。) Sanguozhi vol. 49.
- ^ (漢命加繇為牧,振武將軍,衆數萬人,孫策東渡,破英、能等。繇奔丹徒, ...) Sanguozhi vol. 49.
- ^ (袁宏漢紀曰:劉繇將奔會稽,許子將曰:「會稽富實,策之所貪,且窮在海隅,不可往也。不如豫章,北連豫壤,西接荊州。若收合吏民,遣使貢獻,與曹兖州相聞,雖有袁公路隔在其間,其人豺狼,不能乆也。足下受王命,孟德、景升必相救濟。」繇從之。) Han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9.
- ^ (... 遂泝江南保豫章,駐彭澤。笮融先至,殺太守朱皓,入居郡中。) Sanguozhi vol. 49.
- ^ (獻帝春秋曰:是歲,繇屯彭澤,又使融助皓討劉表所用太守諸葛玄。許子將謂繇曰:「笮融出軍,不顧命名義者也。朱文明善推誠以信人,宜使密防之。」融到,果詐殺皓,代領郡事。) Xiandi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9.
- ^ (後策西伐江夏,還過豫章,收載繇喪,善遇其家。) Sanguozhi vol. 49.
- ^ (王朗遺策書曰:「劉正禮昔初臨州,未能自達,實賴尊門為之先後,用能濟江成治,有所處定。踐境之禮,感分結意,情在終始。後以袁氏之嫌,稍更乖剌。更以同盟,還為讎敵,原其本心,實非所樂。康寧之後,常願渝平更成,復踐宿好。一爾分離,款意不昭,奄然殂隕,可為傷恨!知敦以厲薄,德以報怨,收骨育孤,哀亡愍存,捐旣往之猜,保六尺之託,誠深恩重分,美名厚實也。昔魯人雖有齊怨,不廢喪紀,春秋善之,謂之得禮,誠良史之所宜藉,鄉校之所歎聞。正禮元子,致有志操,想必有以殊異。威盛刑行,施之以恩,不亦優哉!」) Sanguozhi vol. 49.
- ^ (繇長子基,字敬輿, ... 權為驃騎將軍,辟東曹掾,拜輔義校尉、建忠中郎。 ... 權稱尊號,改為光祿勳,分平尚書事。年四十九卒。後權為子霸納基女,賜第一區,四時寵賜,與全、張比。) Sanguozhi vol. 49.
- ^ (基二弟,鑠、尚,皆騎都尉。) Sanguozhi vol.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