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인게스 전투
Battle of Graignes![]() |
그라인게스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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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의 미국 공중 착륙의 일부 | |||||||
![]() 미 82공수사단 그레이게인과 아메리칸파라트로퍼 시민들에게 위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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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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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과 지도자 | |||||||
찰스 D. 존스턴 † 레로이 D. 브룸미트 | 베르너 오스트텐도르프 | ||||||
힘 | |||||||
제3대대대 낙하산 보병연대 182명 | 17 SS 팬저그레나디에 사단 괴츠 폰 베를리칭겐 | ||||||
사상자 및 손실 | |||||||
32명 사망 (1998년 17명 처형) | 사망자 100명, 부상자 200명(최상) | ||||||
26명의 민간인 처형 |
그레이네즈 전투는 1944년 6월 10일부터 12일까지 프랑스 그레이네스에서 싸운 제2차 세계 대전 오버로드 작전 초기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일부였다. 교전 기간 동안 미 82공수부대의 미국 낙하산 부대원들은 제17 SS 팬저그레나디에 사단 괴츠 폰 베를리칭겐에 대항하여 이틀 동안 마을을 지켰다. 이 조치는 6월 13일 블러디 걸치 전투에서 격퇴된 카렌탄에 대한 제17 SS 판저그레나디에의 반격을 지연시켰다. 독일군은 그레이네스를 탈환한 뒤 미군 구호소 포로로 끌려간 민간인 44명과 다수의 전쟁포로를 학살하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착지 및 마을 지원
1944년 6월 6일 화요일 D-Day 02:00 직후, 미국 82공수사단의 일부인 제3대대대 507 낙하산 보병 연대 소속 미국인 낙하산 부대원 12명이 카렌탄 남쪽 늪지대에 흩어져 있었다. 이들은 암프레빌 인근 드롭존 'T'에서 북서쪽으로 18마일 떨어진 곳에 떨어졌을 것으로 예상됐으나 결국 프랑스 마을 그레이네즈 인근으로 떨어졌다. D-Day에 미군 공수부대 중 최악의 오드롭이었습니다.
1000시간이 되자 제507대대장 레로이 D의 지휘 아래 25명의 낙하산 부대가 출동했다. 브룸미트는 마을에 모여 있었다. 2시간 후, 찰스 D 소령이 이끄는 제3 대대/507 대대가 더 도착했다. 존스턴 부대원들은 적진에 깊숙이 뒤쳐져 있었고 낙하 지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착륙한 곳에 남아 그레이네스를 방어하기로 결정되었다.
미국인들이 방어 태세를 갖추기 위해 출근하자 박격포 소대는 묘지 주변을 파고들어 분대를 보내 교회 종탑을 감시초소로 점령했다. 그 유리한 지점에서 관찰자는 서쪽과 남서쪽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도로와 오솔길의 네트워크를 방해받지 않고 감상했다. 이런 방어 태세를 갖추는 동안 존스턴 소령은 소년학교에 지휘부를 설치했다. 이 파고드는 과정 내내 더 많은 미국 낙하산 부대가 그레이네스에 계속 도착했고, 다음날(D+1)이 끝날 무렵에는 그 그룹의 규모가 182명(장교 12명, 사병 170명)으로 커졌다.
6월 6일 아침, 마을의 시장 M. (Monsieur) 알퐁스 보이디는 그의 집 뒤편 들판에서 미국의 낙하산 부대를 발견하기 위해 깨어났다. 그는 정보를 제공하고 나중에 마을 회의를 소집하여 공급 상황을 평가했다. 그 회의 동안, 적들을 돕는 것과 함께 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낙하산 부대를 먹이는 만장일치의 결정이 있었다. Me (마담) Me (Madame) Boursier 부인의 지시에 따라 그레이네 여인들은 매일 두 끼를 대접할 수 있도록 24시간 요리하기 시작했다. 남성, 여성 그리고 심지어 어린이들로 이루어진 팀들은 귀중한 인양 장비들을 마차 짐수레로 다시 그레이네 경계로 운반하고 있었다.
접촉 및 폭행
6월 10일 토요일 오후, 기계화된 순찰대가 먼 중위의 B 중대, 1/501 낙하산 보병 연대 대원들이 유인한 방어 진지 쪽으로 접근했다. 그들은 순찰대가 가까이 접근하게 한 다음, 사격을 개시하여 4명을 죽였다. 부대원들이 죽은 독일인의 주머니를 뒤지자 그가 장갑사단의 정찰대대에 배속될 것을 밝힌 몇 가지 서류를 발견했다.
일요일에는 적의 흔적이 없고 그날 아침 모두 조용해서 존스턴 소령은 일부 병사들의 미사 참석을 허락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도중에 한 여성이 "독일이 온다! 너 자신을 구하라구! 불과 10분 동안 지속된 첫 번째 공격은 조정되지 않은, 단편적인 노력이었다.
약 1400시간 후에, 독일인들은 그레이네스에 대한 박격포 공격을 시작했다. 이 준비 사격은 마을 주변의 방어선 측면에 대한 2차 보병의 공격이 신속하게 뒤따랐다. 이번에는 공격진이 워낙 발빠르게 움직여서 어느 순간 경계선이 뚫릴 뻔했다. 그러나 브룸미트 대위는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재빨리 병력을 이동시켰고, 라인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마을 중심을 방어하는 다연장 기관총의 십자포화에 박격포 화력이 큰 손실을 입히고 적 보병 수십 명이 잡히면서 다시 한번 낙하산들의 지원 사격은 패배를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저녁이 되자 초소에는 무거운 차량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관측된 증거에 의하면 그레이네스가 곧 대형 공격의 표적이 될 것으로 보이므로, 존스턴 소령은 모든 민간인을 멀리 보냈다. 약 1900시간, 독일 88mm 총 두 발이 몇 킬로미터 떨어진 인근 티에우빌의 높이에서 그레이네스를 향해 발사되었다. 이것은 재빨리 미국인들을 혼란스럽게 했고 존스턴 소령을 죽였다. 벨프리에 있는 감시초소가 파괴된 상황에서, 병사들은 더 이상 어떠한 정도의 유효 정확도로 다가오는 적에 대항하여 박격포를 동원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독일군이 그레이네스에 최후의 공격을 가했을 때, 수비대원들은 마을 주변에 흩어져 있는 몇 개의 고립된 저항의 주머니로 전락했다. 많은 경우에 남자들은 탄약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자 적들은 재빨리 외곽을 넘나들며 마을 중심가로 이동하는 등 상황을 착취했다. 존스턴 소령이 죽으면서 그라인게스의 병력 지휘부는 브룸미트 대위에게 넘어갔다. 브룸미트는 계속해서 그 남자들에게 짝을 지어 카렌탄이나 세인테-메르-에글리즈로 가도록 명령했다.
제17 SS 팬저그레나디에 사단 소속 원소 괴츠 폰 베를리칭겐이 그라네스를 상대로 마지막 공격을 감행했다. 17대가 공격했을 때는 약 2,000명의 연대 규모의 병력으로 공격했다. 승산은 10대 1로 독일군에게 유리했다. 6월 10일과 11일 그라인게임을 옹호하는 182명의 낙하산 부대원들은 독일인들에게 100명의 사망자와 200명의 부상을 입혔다.
와펜 SS 전쟁 범죄
6월 11일 전투가 끝날 무렵 17 SS가 교회 안으로 들어가 아브라함 '버드' 소피안 대위의 구호소를 발견했다. 소피안(배터리 외과 의사, 낙하산병)은 문 앞에 흰 깃발을 흔들며 그들에게 건물을 내주었었다. SS 부대는 함장과 그의 두 명의 의료진, 그리고 14명의 부상당한 미국 낙하산 부대를 벽에 기대도록 강요했다. 포로로 잡힌 미국인들은 정의상 전쟁포로였으며 따라서 독일은 1929년 제네바 협약의 조건에 따라 보호되었어야 했는데, 이 협약은 독일이 서명자였다. 실제로 부상당한 미국인들은 두 집단으로 나뉘어 살해되었다. 부상자 5명으로 구성된 1개 무리는 인근 연못 가장자리로 끌려갔고, SS부대는 이들을 총검으로 공격해 시신을 물 속에 던졌다. 나머지 9명은 남쪽으로 약 4km 떨어진 총구를 겨누고 르메스닐앙고트 마을 인근 들판으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들판에 도착한 일행은 어쩔 수 없이 구덩이를 파야 했다. 구멍이 뚫린 후 SS는 부상병들을 일일이 머리를 관통해 총을 쏘고 몸을 구덩이에 밀어 넣었다.[1] 같은 날 어느 시점에서는 소피안 대위와 그의 두 명의 의병도 SS에 의해 살해되었다. 집합적으로, 와펜 SS 부대가 무방비 상태의 전쟁 포로를 상대로 자행한 이 17건의 살인은 전쟁 범죄로 구성되었다.[2]
다른 독일인들은 미군을 도운 혐의를 받고 있는 프랑스 민간인들을 조직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했다. 총 44명의 마을 사람들이 독일인들에 의해 미국인들과의 협력자로 의심되는 용의자로 취조된 후 총살되었다. 다른 친위대원들은 레블라스티에 신부와 레바르반촌 신부를 정류장에서 바깥 뜰로 끌고 가서 둘 다 총으로 쏴 죽였다. 그리고 나서 독일인들은 마들렌 페제릴과 80세의 유제니 뒤자르딘을 발견했고 그들 둘 다 침대에서 총으로 쏴 죽였다. 그 후 SS부대는 그들이 훔칠 수 있는 귀중품을 찾아 마을을 샅샅이 뒤졌다.[3]
6월 13일 화요일, 독일인들은 마을을 불태웠다. 그들은 르블라스티에 신부, 르바르반콘 신부, 유제니 뒤자르딘, 마들렌 페제릴의 몸에 휘발유를 뿌린 다음 불을 질렀다. 이어진 화재는 통제 불능으로 타올라 66채의 집과 소년학교, 음메 부르시에의 카페, 12세기 교회를 파괴하도록 허용되었다. 또 다른 159채의 가옥과 다른 건물들은 화재나 전투의 결과로 피해를 입었다. 6월 11일 전투와 그 뒤를 이은 독일군의 보복이 있기 전, 그레이네즈 마을은 200여 채의 분산된 집과 다른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후, 두 집만이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때쯤이면 그레이게인 수비수들 대부분이 이미 떠난 뒤였다. 소그룹들이 6월 12일 밤 늦게 카렌탄에 도착했다. 다른 부대원들, 몇몇은 혼자 그리고 몇몇은 짝을 지어 6월 13일과 14일에 계속 여과되었다. 리골트 가문에 의해 숨겨져 6월 15일에서 16일 밤 조셉 폴리오트에 의해 카렌탄으로 끌려간 21명의 남자는 그레이네스에서 마지막으로 미국 전선으로 돌아왔다. 원래 182명 중 150명의 병사가 살아서 출격했다.
여파
잘못 투하된 507호의 낙하산 부대가 제17 SS 기갑 그르나디어의 진격을 저지하지 않았다면 이 사단은 101 공수 사단 이전에 카렌탄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507호는 영국으로 돌아온 7월 15일까지 노르망디에서 전투를 계속했다. 이후 17공수 사단에 재배치된 이 연대는 계속해서 라인 강을 가로지르는 공중 공격인 Bulge and Operation Varsity 전투에서 전투를 벌였다. 1945년 9월, 507 낙하산 보병 연대가 미국으로 돌아와 해체되었다.
1986년 7월 6일, 12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의 폐허에서 기념식이 열렸는데, 그 동안 11명의 마을 사람들이 3/507 PIR의 남자들을 돕는 역할을 한 공로로 공로상을 받았다. 그 상들 중 6개는 사후에 받은 것이다.
대중문화에서
DC Vertigo Comics는 Six Days라고 불리는 Graignes 전투에 관한 그래픽 소설을 출판했다. D-Day의 잃어버린 장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실화. 로버트 벤디티와 케빈 마우러는 식스 데이즈(벤디티의 삼촌은 전투 중에 죽었다)를 썼다. 안드레아 무티는 커버와 인테리어 아트를 그렸다.
추가 읽기
- 모건, K. A. 마틴: 201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사진 역사인 D-Day의 미국인들, 제니스 프레스.
참조
![]() | 위키미디어 커먼즈에는 그레이네즈 전투와 관련된 미디어가 있다. |
- ^ "Lest We Forget".
- ^ O'Leary, Margaret R.; O'Leary, Dennis S. (24 February 2011). Tragedy at Graignes: The Bud Sophian Story. ISBN 978-1-4502-8331-1.
- ^ "Normandy: Battle of Graignes, an Incredible Story".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1 August 2016. Retrieved 2016-07-12.
- 베넷, G.H. 목적지 노르망디: D-Day에 있는 세 개의 미국 연대, Praeger, Wesport (Conn), 2006.
- D-Day: Down to Earth - The Return of the 507, Jump Cut Productions DVD, 2005.
- 폭스, 게리 N. 폭스 그라인먼트: 프랑코아메리카 기념관, 그레이 인쇄 회사, 포스토리아 (오하이오) 1990.
- 모건, 마틴 KA 아래로 지구: 2004년, 노르망디, 쉬퍼, 앳글렌(PA)에 있는 제507 낙하산 보병 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