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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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3" | 조선을 이끌어갈 지도자 - 선구 여론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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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운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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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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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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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헌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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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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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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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3" style="font-size:small;" | 백분율의 합이 100%를 넘는 것은 복수 응답이 있었기 때문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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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 계획 == |
== 선거 계획 == |
2022년 12월 20일 (화) 08:37 판
조선인민공화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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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人民共和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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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 자주독립국가 自主獨立國家 Chaju dongnip kukka | |||
국가 | 애국가 | |||
수도 | 서울 | |||
정치 | ||||
정치체제 | 주석제 | |||
부주석 | 여운형 | |||
역사 | ||||
• • 조선인민공화국 성립 • 미국 서울 점령과 군정 • 모스크바 삼상회의 • 태극기 게양 •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 민주주의민족전선 설립 | 1945년 9월 6일 1945년 9월 8일 1945년 12월 16일 1946년 1월 14일 1946년 1월 16일 1946년 2월 19일 | |||
지리 | ||||
면적 | 220,951 km2 | |||
인문 | ||||
공용어 | 한국어 | |||
경제 | ||||
통화 | 원 |
한국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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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영어: People's Republic of Korea)은 광복 직후 선포된 미승인국이다. 좌우를 망라한 구성을 갖고 있었으며, 한국인들이 외세의 도움 없이 한반도 전역을 대상으로 스스로 세웠다는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지방조직은 미군에게 해산되고 조선인민공화국은 미군정에 의해 와해된다. 이후 한반도에는 소비에트 민정청과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에 의해 남과 북에 별개의 정부가 생긴다.
1945년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선포한 조직이다. 이들을 정치적 성향별로 분류하면 민족주의자 9명, 여운형계의 중도좌파가 10명, 그리고 3분의 2 가량이 공산주의자였다. 상징적으로 주석 이승만, 내무부장 김구를 내세우기는 하였으나, 정작 이승만과 김구 본인은 이 단체의 공식 직책을 수락하지 않았다. 남북, 미국, 소련에게 인정받지 못하게 되어 1946년에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해산, 재집결되었다. 조선인민공화국 해체 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설립 과정
태평양 전쟁에 뒤늦게 참전한 소련 연방이 함경북도 웅기군과 나진시를 8월 12일까지 점령하고, 이어 8월 13일에는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일본 제국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매우 당황했었으며 8월 15일 오전 9시에 여운형을 총독부로 임명했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경성시도 소비에트 연방이 점령할 상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선인들을 이용해 안전을 위했던 것이다. 평소 때에 건국동맹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여운형 등은 총독부가 되자마자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을 단교하고, 광복 이후 곧바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이어 경성일보와 경성방송국 등이 원래 조선인들의 손에 넘어갈 듯했으며, 지방에서도 역시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을 제압했다.
한편, 한반도의 함경북도 청진시가 8월 16일에 소비에트 연방이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함경남도 함흥시와 원산시를 장악했다.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은 8월 18일에는 만주국을 멸망시켰다.
건준의 결성 초기부터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하게 된 것은 여운형•건국동맹과 사회주의자들의 이념적 친화성, 그리고 일제시기 이래 사회주의자들의 친분관계도 바탕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소련의 서울 진주 소식이 크게 작용했다. 여운홍에 따르면 여운형은 8월 15일 아침에 엔도를 만난 뒤 정백과 함께 돌아와 단독으로 담소를 나누었으여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할 것이기 때문에 사태가 달라졌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중략) 이에 여운형과 건준 참여세력들은 사회주의 계열을 적극 참여시켜 소련군의 남한 진주에 대응하는 국가건설을 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1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이 38선 이남으로 내려오지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자 조선총독부는 8월 20일에 곧바로 반격을 시도하여 결국 다시 경성일보와 경성방송국 등이 모두 조선총독부의 손아귀로 넘어간 후, 9월 8일에 인천시에 상륙한 미국에게 이양시켰다.
1945년 9월 6일, 건준이 "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조선인민공화국"을 결정·선포하였다. 중앙인민위원 55명과 후보위원 20명, 고문 12명을 선출하였으며, 군정기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남북의 전 도,군,면에 인민위원회를 설립했다.
인공의 수립이 조공의 일방적인 독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운형도 인공 수립에 적극 관여하였다. 여운형은 9월 6일의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개회사와 격려사에서 비상한 시기에 연합국의 진주에 대비하여 "연합국과 절충할 인민총의 집결체"로서 인공이 수립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여운형은 또한 "혁명가는 정부를 조직하고 인민의 승인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인민이 승인만 한다면 조선인민공화국과 그 정부는 그대로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여운형은 북한에서의 "소군정의 조치를 당연히 연합국의 공동방침으로 해석"하여 남한에서 "미군 역시 조선인민에게 맡길 줄로 예상"하는 낙관적 정세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여운형은 일제시기부터 혁명단체와 혁명가들이 중심이 되어 과도정권을 수립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정권구상은 인공과 다르지 않았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5
여운형은 인공 수립에 합의한 뒤 건준 내부의 반발에 부딪치자 조각발표를 보류하려고 하였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여운형은 인공 대표대회에서 인사도 했고 인공 부주석의 지위를 거부하지도 않았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7
인공 수립 당시 여운형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38도선 이북에 있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각도 관공서와 일본인 공사 재산을 압수하고 일군을 무장해제시켜, 모든 것을 조선인민에게 맡길 뿐 그 목적이 없는 듯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소군의 조치를 당연히 연합군의 공동한 최고방침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하였으며 미군도 38도 이남에 진주하여 오면 역시 조선인민에게 모든 것을 맡으라 할 줄 예상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맡을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급히 인민대표회의를 열어 국호를 결정하고 정부조직법을 결정하며 인민위원을 선거하였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69
1945년 9월 14일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외무부장 김규식, 재무부장 조만식, 군사부장 김원봉, 경제부장 하필원, 농림부장 강기덕, 보건부장 이만규, 교통부장 홍남표, 보안부장 최용달, 사법부장 김병로, 문교부장 김성수, 선전부장 이관술, 체신부장 신익희, 노동부장 이주상, 서기장 이강국, 법제국장 최익한, 기획부장 정백 등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의 정강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정치, 경제적으로 완전한 자주적 독립 국가의 건설을 기함
- 일본 제국주의와 봉건 잔재 세력을 일소하고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에 충실하기를 기함
- 노동자, 농민 기타 일체 대중 생활의 급진적 향상을 기함
- 세계 민주주의 제국의 일원으로서 상호 제휴하여 세계 평화의 확보를 기함
논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수락 거부
제1차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주석으로 추대되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이었던 이승만은 1945년 10월 18일에 귀국한 후 10월 22일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추대된 것은 모르는 일이며 취임하겠다고 호의를 표한 적도 없다고 밝혔으며,[1][2] 11월 7일에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공식적으로 주석직을 거부하였다.[3][4] 뒤이어 귀국했던 김구와 김규식 또한 11월 28일에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조선인민공화국과 이야기가 오고간 것이 없었다며 관계된 것을 부인하였다.[5][6]
내각
- 주석: 이승만
- 부주석: 여운형
- 국무총리: 허헌
- 내무부장: 김구, 대리 조동혁·김계림
- 외무부장: 김규식, 대리 최근우·강진
- 재무부장: 조만식, 대리 박문규·강병도
- 군사부장: 김원봉, 대리 김세용·장기욱
- 경제부장: 하필원, 대리 김형선·정태식
- 농림부장: 강기덕, 대리 유축운·이광
- 보건부장: 이만규, 대리 이정윤·김점권
- 교통부장: 홍남표, 대리 이순근·정종근
- 보안부장: 최용달, 대리 무정·이기석
- 사법부장: 김병로, 대리 이승엽·정진태
- 문교부장: 김성수, 대리 김태준·김기전
- 선전부장: 이관술, 대리 이민준·서중석
- 체신부장: 신익희, 대리 김철수·조두원
- 노동부장: 이주상, 대리 김상혁·이순금
- 서기장: 이강국, 대리 최성환
- 법제국장: 최익한, 대리 김용암
- 기획부장: 정백, 대리 안기성
이 각료 명단은 비슷한 시기 중도우익성향 단체 '선구회'가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대중이 원했던 지도자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민의를 반영했다.
조선을 이끌어갈 지도자 - 선구 여론조사 | ||
---|---|---|
순위 | 이름 | 득표율 |
1위 | 여운형 | 33% |
2위 | 이승만 | 21% |
3위 | 김구 | 18% |
4위 | 박헌영 | 16% |
5위 | 이관술 | 12% |
6위 | 김일성 | 9% |
7위 | 최현배 | 7% |
8위 | 김규식 | 6% |
9위 | 서재필 | 5% |
10위 | 홍남표 | 5% |
백분율의 합이 100%를 넘는 것은 복수 응답이 있었기 때문임. |
선거 계획
인공은 10월 3일 총선거를 통한 제2회 전국인민대표회의를 46년 1월 소집한다는 취지문을 발표하였다. 곧 전국적인 총선거를 통해 인민대표회의를 소집함으로써 인공의 대중적 지지와 대표성을 확보하겠다는 방침이었다. 물론 1945년 9월 6일의 제1회 인민대표자회의에서도 인공이 전 인민의 광범한 민주주의적 선거로 선출되지 못하였으므로 '임시혁명정부'이며 "혁명시기에 대응하는 과도적 존재"라는 입장에서 "늦어도 2년 이내로 될 수 있는 빠른 기간 내에 제2차 전국인민대표대회를 결의"하였다.[7]
인공주도세력에게 1946년 3월 1일 제2차 전국인민위원회 대표회의의 선거는 인민의 총의를 물어 완전한 정부의 실현, 또는 신국가를 건설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에 인공은 선거에 실패한다면 승리한 정당에게 정권을 내어주고,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는다면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매진하겠다는 비장한 입장을 밝혔다.[8]
같이 보기
각주
- ↑ “우리自主獨立妨害하면 어떤勢力과도싸운다”. 《자유신문》. 1945년 10월 23일. npfp_1945_10_23_v0001_0010. 2020년 5월 20일에 확인함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경유.
(問) 人民共和國의 主席就任懇請에 好意를 보하셧다는데? / (答) 드르니까 主席으로 推薦되었다고도하나 全然알지못하는일이며 就任하겟다고 好意를 表한일도업다
- ↑ “이승만, 민족통전,38선,신탁문제 등에 관해 기자회견”.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dh_001_1945_10_22_0020. 2020년 5월 20일에 확인함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경유.
- ↑ “一喜一悲·非常한機會 重要段階에直面 / 人民共和國主席은受諾할수업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8일. npfp_1945_11_08_v0001_0040. 2020년 5월 20일에 확인함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경유.
- ↑ “이승만, 인공주석 수락거부 성명 발표”.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dh_001_1945_11_07_0080. 2020년 5월 20일에 확인함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경유.
- ↑ “臨時政府正副主席, 人民共和國入閣否認, 再昨日許憲氏와 會談中意思表示”. 《중앙신문》. 1945년 11월 29일. UCI G701:B-00065280099. 2020년 5월 20일에 확인함 – 국립중앙도서관 경유.
- ↑ “김구와 김규식, 인공 입각설 부인”.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dh_001_1945_11_28_0040. 2020년 5월 20일에 확인함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경유.
-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86~87
-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p86~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