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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가톨릭 성직자 정보
|제목모양=교황
|이름=비오 1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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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교황 베네딕토 15세|베네딕토 1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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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비오 11세'''(
그의 치세기간 중에 1870년 이래 문제였던 [[로마 문제]]가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이에 따라 교황은 오랜 감금 생활에서 해방되어 [[바티칸 시국]]에서나마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1925년 비오 11세는 [[반성직자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10월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도록 제정하였다. 이는 구세사의 특수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왕임을 경축하고 그의 통치권이 개인과 가정과 사회 및 전 우주에 두루 미치고 있음을 강조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 생애 초기와 경력 ==
[[파일:The Papal Parentage.JPG|
아킬레 라티는 1857년 [[이탈리아]] [[
=== 폴란드에서의 추방 ===
[[파일:As a Young Priest.JPG|
아킬레 라티의 사제 생활은 1918년에 들어서면서 급속도로 바뀌었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아킬레 라티에게 도서관장 생활을 그만두고 외교관으로서의 새 임무를 맡을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교황의 명령을 받아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향 아래 있었던 [[폴란드]]에 교황 순시관(즉 교황의 대표자)으로 파견되었다. 1918년 10월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전 세계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폴란드의 독립을 축하해주었다.<ref name="Schmidlin III, 306">Schmidlin III, 306</ref> 1919년 3월 그는 열 명의 새 주교들을 임명하였는데, 여기에는 아킬레 라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아킬레 라티의 신분을 교황대사로 승격시켰다. 1919년 10월 아킬레 라티는 [[명의주교|명의대주교]]로 임명되었다.<ref name="Schmidlin III,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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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 선출 ===
[[파일:Pius XI seated.jpg|130px|
오랫동안 학문에 몸 담아왔던 그는 교회 내에서 급속도로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1932년 6월 3일 [[추기경회의]]에서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세 명의 [[추기경]] 임명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에는 아킬레 라티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킬레 라티는 또한 [[밀라노]] 대교구장으로도 임명되었다. 베네딕토 15세는 추기경 서임식에서 새로 임명된 추기경들에게 “자,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붉은 모자를 씌워 주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하얀색이 될 것입니다.”라고 농담을 하였다.<ref name="Fontenelle 40">Fontenelle 40</ref> 바티칸에서의 축하 연회를 마치고, 아킬레 라티는 자신의 새로운 소임에 대한 영적인 준비를 하기 위해 [[몬테카시노]]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잠시 피정을 떠났다. 그리고 1921년 8월 프랑스의 [[루르드]]까지 가는 밀라노의 성지 순례에 동참하였다.<ref name="Fontenelle 40"/> 아킬레 라티는 1921년 9월 8일 밀라노에서 착좌식이 있기 전에 자신의 고향인 데시오를 방문하였으며, 그곳에서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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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 ==
비오 11세의 통치기간은 바티칸을 위한 바쁜 외교적 활동의 연속이었다. 교회는 극적으로 [[이탈리아 왕국 (1861년~1946년)|이탈리아 왕국]] 정부와 [[로마 문제]]를 해결하고 [[교황령]]인 [[바티칸 시국]] 독립의 인정을 받았으며, [[프랑스]]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등 1920년대에 여러 가지 면에서 진척을 이루었다.
=== 프랑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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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령]]의 영토 대부분은 1860년 [[이탈리아 통일|근대 통일 이탈리아 국가]]를 세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국왕(1861 ~ 1878)의 군대에 의해 강탈당하였으며, 1870년에는 로마를 포함한 나머지 영토도 모두 강탈당하였다. 이후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는 줄곧 대립 상태를 유지하였다. 교황들은 이탈리아의 교황령 점령을 인정하지 않고 바티칸에서 칩거하며 항의를 하였으며, 이탈리아 정부는 항상 반교권주의적인 정책으로 맞대응하였다. 이제 비오 11세는 타협만이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였다.
[[파일:
[[베니토 무솔리니]] 역시 자신의 새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라도 교황청과 협상을 벌이는 것이 이득이 있으리라고 보고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2년 반 동안 협상을 벌인 끝에 1929년 2월 11일 교황은 이탈리아 정부와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하는데 동의하였다. 라테란 조약 제1항에서 교황청은 과거 교황령 시절의 영토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이탈리아로부터 자주 독립국으로서의 바티칸 시의 지위를 보장받게 되었다. 비오 11세는 19세기에 이탈리아 반도가 통일됨으로써 교황령이 몰락한 이후 (비록 최소한의 영토를 가진 국가이기는 해도) 주권국가의 국가원수 자리를 복원한 첫 번째 교황이 되었다. 제2항은 이탈리아와의 정교 협정이다. 이탈리아 정부는 가톨릭교회를 이탈리아의 국교로 공식적으로 인정하였으며, 이혼을 불법화하고 가톨릭교회에 혼인 사항에 대한 법적 권한을 부여하였으며, 모든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다시 실시하도록 하였다. 그 대신에 성직자는 정치에 대해 일절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 라테란 조약의 세 번째 조항은 이탈리아가 바티칸이 교황령을 상실한 데 대한 금전적인 보상을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비오 11세가 살아있는 동안 바티칸은 이탈리아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주식시장과 부동산에 투자하였다. 바티칸은 투자 관리를 위해 평신도 [[베르나르디노 노가라]]에게 운영을 맡겼다. 주식과 금, 선물시장 투자에 뛰어난 인물이었던 그는 바티칸의 재정을 상당량 증대시켰다. 그렇지만 세간에 떠도는 소문과는 달리 실제로 바티칸은 그렇게 엄청난 부를 축적하지는 않았다.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받은 보상금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은 액수였으며, 투자를 통해 얻은 자금의 대부분은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바티칸의 역사적인 건물들의 유지비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건물들은 1870년까지만 해도 교황령의 각 지역으로부터 거두어들인 자금으로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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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
[[파일:Bundesarchiv Bild 183-R24391, Konkordatsunterzeichnung in Rom.jpg|
비오 11세는 세속 정부들이 교회의 권리를 점점 더 깊숙이 관여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에 대항하여 교회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정교 조약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나라이든지 정교 조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열성적이었다. 재위기간 동안 그는 몇몇 지방 정부들을 포함해서 [[나치 독일]] 정부 및 오스트리아와 열두 개의 [[정교 협약]]을 맺었다. 1933년 1월 30일 독일의 총리가 된 [[아돌프 히틀러]]가 정교 협약을 맺자는 제의를 하자 비오 11세는 이를 수락하였다. 교섭은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훗날의 [[교황 비오 12세]])이 맡았다. 1933년 6월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과 독일 정부는 교회의 자유 보장, 가톨릭 단체와 청년 모임의 독립, 학교에서의 종교 교육을 포함한 [[제국종교협약]](Reichskonkordat)을 체결하였다.
=== 인종주의 단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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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과 안장 ==
[[파일:PiusXItomb2.jpg|
비오 11세는 이리 오랫동안 질병을 앓았으며, 1938년 11월 25일 몇 시간에 걸친 심장마비를 두 번이나 겪었다. 그는 숨을 쉬는 것을 상당히 힘들어했기 때문에 교황궁 안에만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ref name="Confalonieri 356">Confalonieri 356</ref> 비오 11세는 자신이 아끼는 최고급 포도주병 두 개에 ‘2000년이 되는 해에 짐의 후임자에게’라는 라벨을 붙이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ref name="Confalonieri 356"/> 나중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실제로 그 포도주병을 받았는지의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비오 11세는 자신이 설립한 [[교황청 과학원]]에서 마지막 강론을 하였다. 그는 준비된 문서 없이 과학과 종교, 특히 가톨릭교회의 관계에 대해 강론하였다. 이것이 비오 11세가 임종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강론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Confalonieri 358</ref> 한 젊은 사제는 교황에게 ‘Principiis obsta(애초에 막아라)’라는 고대 로마인의 속담을 인용하면서 약을 먹을 것을 중용하였으나, 교황은 웃으면서 “신부님은 다음 구절을 빠뜨리셨습니다. 애초에 막지 못하여 병이 깊어지면 어떠한 처방을 해도 이미 소용 없습니다. 저는 약을 먹고 낫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라고 말했다.
1939년 1월 교황의 상태는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 비오 11세는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으며 걷는 것도 어려워했다. 그리고 호흡장애가 증가하면서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해도 일어날 수가 없게 되었다. 1939년 1월 7일 교황의 주치의들은 교황청 관료들에게 교황의 죽음이 머지않았다고 일러주었다.<ref name="Confalonieri 365">Confalonieri 365</ref> 교황청은 밀라니, 로치, 보나모네, 제멜리, 비안키<ref name="Confalonieri 365"/> 등 이탈리아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전문의들과 교수들로 팀을 구성해 교황의 진단을 맡겼다. 그들은 [[교황 비오 12세|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과 [[교황 바오로 6세|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몬시뇰]]에게 기관지발작과 결합된 심부전증으로 인해 교황은 이미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다는 안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비오 11세는 마치 조만간 다시 건강을 되찾을 수 있기라도 하듯이 [[도메니코 타르디니]]와 함께 일반 알현 계획을 세웠지만, 이미 그는 정상적으로 숨을 쉴 수 없었으며 따라서 몸을 제대로 움직이거나 심지어 잠결에 돌아누울 힘도 잃어버렸다. 그가 주위 사람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내 영혼은 평온하게 여러분 곁을 떠납니다.”이다. 그의 말은 명료하고 확고부동하게 전달되었다.<ref>Confalonieri 373</ref> 교황 비오 11세는 1939년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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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교황 비오 11세| ]]
[[분류:1857년
[[분류:1939년
[[분류:20세기 교황]]
[[분류:20세기 이탈리아 사람]]
[[분류:롬바르디아주 출신]]
[[분류:병사한 사람]]
[[분류:백수리 훈장 (폴란드) 수훈자]]
[[분류:성좌의 외교관]]
[[분류:이탈리아 출신 교황]]
[[분류:이탈리아의 사서]]
[[분류:이탈리아의 산악인]]
[[분류:이탈리아의 반공주의자]]
[[분류:이탈리아의 보수주의]]
[[분류:밀라노 대교구장]]
[[분류:20세기 로마 가톨릭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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